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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원(李福源)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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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수지(綏之)
호(號)쌍계(雙溪)
시호(諡號)문정(文靖)
생년1719(숙종 45)
졸년1792(정조 16)
시대조선후기
본관연안(延安)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철보(李喆輔)
저서『천령향함이지락(千齡享含飴之樂)』

[상세내용]

이복원(李福源)
1719년(숙종 45)∼1792년(정조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수지(綏之), 호는 쌍계(雙溪). 이정귀(李廷龜)의 6대손이며, 판서 이철보(李喆輔)의 아들이다.

1738년(영조 14)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음(門蔭)으로 양구현감을 지내던 중에 1754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지평에 임명되어 무학(懋學)‧근정(勤政)‧신질(愼疾)‧납언(納言) 등에 힘쓸 것을 상소하였다. 이어 헌납교리승지대사간이조참의, 예조‧병조‧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거쳐, 1772년 당시 대제학으로 현종의 상호(上號)를 지어 바치고 영조에게서 호피(虎皮)를 하사받았다.

1773년 한때 사직되었으나, 이듬해 다시 이조참판으로 증광시 시관(試官)에 임명되고, 1775년에 형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정조가 즉위하자 영조의 행장‧시장(諡狀)을 찬술하기 위한 찬집청(撰集廳)당상에 임명되었고 영조의 시책문(諡冊文)을 지어 바쳤다. 우참찬병조판서명의록찬집당상(明義錄纂輯堂上)형조판서규장각제학 등을 거쳐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으나 관아를 비웠다 하여 강화유수로 좌천되고 이어 사형수의 자살사건으로 파직되었다.

다시 1780년(정조 4) 이조판서에 제수되고 형조판서우의정좌의정판중추부사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세자부(世子傅)영중추부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 동안 1783년 심양문안사(瀋陽問安使), 1790년 동지 겸 사은사중국에 다녀왔으며, 1783년 종부시에서 간행한 『선원계보기략팔고조도(璿源系譜紀略八高祖圖)』의 발문을 쓰기도 하였다. 문장에 능하여 이치를 주로 하였고, 특히 사명(詞命)에 뛰어나 정조가 신설한 규장각에서 활약하였다.

김익(金熤)과 동시에 재상에 임명되었는데, 두 사람 모두 소박한 선비차림이었고 행실이 독실하였으므로, 당시에 유상(儒相)이라고 불렸다.

저서로 『천령향함이지락(千齡享含飴之樂)』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續朝野輯要

[집필자]

전형택(全炯澤)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