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회(南泰會)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0A8D0DCD68CB1706X0 |
자(字) | 성제(聖際) |
호(號) | 자암(紫巖) |
시호(諡號) | 헌민(獻敏) |
생년 | 1706(숙종 32) |
졸년 | 1770(영조 46)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의령(宜寧)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남근명(南近明) |
출신지 | 양근(楊根) |
[관련정보]
[상세내용]
남태회(南泰會)
1706년(숙종 32)∼1770년(영조 4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성제(聖際), 호는 자암(紫巖). 양근(楊根) 출신. 부친은 의빈도사(儀賓都事) 남근명(南近明)이다.
1736년(영조 1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47년에 문학(文學)이 되고 정언을 거쳐 지평이 되었다.
1752년 수찬이 된 뒤 헌납‧교리 겸 문학‧승지 등을 두루 거쳐 1757년에는 대사간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도승지가 되었고, 1762년에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1767년에는 형조판서‧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뒤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지중추부사가 된 뒤, 다시 형조판서를 역임하고 1769년에 동지의금부사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헌민(獻敏)이다.
1736년(영조 1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47년에 문학(文學)이 되고 정언을 거쳐 지평이 되었다.
1752년 수찬이 된 뒤 헌납‧교리 겸 문학‧승지 등을 두루 거쳐 1757년에는 대사간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도승지가 되었고, 1762년에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1767년에는 형조판서‧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뒤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지중추부사가 된 뒤, 다시 형조판서를 역임하고 1769년에 동지의금부사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헌민(獻敏)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國朝榜目
國朝榜目
[집필자]
손승철(孫承喆)
명 : "태회(泰會)"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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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