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진(趙榮進)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70C601C9C4B1703X0 |
자(字) | 여읍(汝揖) |
시호(諡號) | 정헌(定獻) |
생년 | 1703(숙종 29) |
졸년 | 1775(영조 51)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양주(楊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조규빈(趙奎彬) |
[관련정보]
[상세내용]
조영진(趙榮進)
1703년(숙종 29)∼1775년(영조 5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여읍(汝揖). 부사 조규빈(趙奎彬)의 아들이다.
신임사화 후 아버지가 벼슬을 버리고 향촌에 은거하였으므로 역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가, 1744년(영조 20) 42세로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음보(蔭補)로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제용감봉사(濟用監奉事)를 거쳐, 남원부사로 재임중인 175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정언을 배수받았다.
1759년 동부승지‧한성좌윤을 거쳐 대사헌에 올랐고, 1761년 도승지로서 사도세자의 처형을 강력히 반대하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한때 파직되었으나 다시 대사헌으로 기용되었다. 이어 예조와 병조의 참판을 역임한 뒤 황해도‧경기도 관찰사로 외직을 거쳤으며, 오위도총부도총관‧지중추부사를 지낸 뒤 형조판서에 올랐다.
사관(史官)은 그의 성품이 너그럽고, 의리를 지키며, 공명을 탐하지 않아 풍파(風波)의 시기에도 화를 입지 않았다고 평가하였다. 시호는 정헌(定獻)이다.
신임사화 후 아버지가 벼슬을 버리고 향촌에 은거하였으므로 역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가, 1744년(영조 20) 42세로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음보(蔭補)로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제용감봉사(濟用監奉事)를 거쳐, 남원부사로 재임중인 175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정언을 배수받았다.
1759년 동부승지‧한성좌윤을 거쳐 대사헌에 올랐고, 1761년 도승지로서 사도세자의 처형을 강력히 반대하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한때 파직되었으나 다시 대사헌으로 기용되었다. 이어 예조와 병조의 참판을 역임한 뒤 황해도‧경기도 관찰사로 외직을 거쳤으며, 오위도총부도총관‧지중추부사를 지낸 뒤 형조판서에 올랐다.
사관(史官)은 그의 성품이 너그럽고, 의리를 지키며, 공명을 탐하지 않아 풍파(風波)의 시기에도 화를 입지 않았다고 평가하였다. 시호는 정헌(定獻)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雲石遺稿
國朝榜目
淸選考
雲石遺稿
[집필자]
이문기(李文基)
명 : "영진(榮進)"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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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