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구(徐命九)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11CBA85AD6CB1692X0 |
자(字) | 우경(虞卿) |
호(號) | 약허(若虛) |
생년 | 1692(숙종 18) |
졸년 | 1754(영조 30)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대구(大丘)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서종신(徐宗愼) |
[상세내용]
서명구(徐命九)
1692년(숙종 18)∼1754년(영조 3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우경(虞卿), 호는 약허(若虛).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 서종신(徐宗愼)의 아들이다.
1717년(숙종 4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로 보임되었다.
1722년(경종 2) 영조가 왕세제로 있을 때 소론(少論)의 과격파인 김일경(金一鏡) 등이 환관 박상검(朴尙儉)‧문유도(文有道) 등을 시켜 세제를 죽이려 하자 이를 탄핵하여 음모를 막았다.
영조가 즉위한 뒤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로 나갔고, 1725년(영조 1) 사서(司書)‧필선(弼善)‧보덕(輔德)‧집의‧헌납(獻納)을 지내고, 1731년 사간‧부응교‧승지를 거쳐 1741년 개성유수가 되었다.
이듬해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로 갔다가 귀국한 뒤 한성부좌윤을 지내고 대사헌‧경기관찰사‧한성부우윤‧공조참판‧동지의금부사를 역임하였다.
1752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과중한 조세부담을 삭감하게 하고 관하지방관들의 부정을 엄격히 처벌하는 등 치적을 올렸다.
영조가 죽자 거듭 왕계(王系)의 정통을 지키는 청렴한 관리로 이름이 높았다.
1717년(숙종 4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로 보임되었다.
1722년(경종 2) 영조가 왕세제로 있을 때 소론(少論)의 과격파인 김일경(金一鏡) 등이 환관 박상검(朴尙儉)‧문유도(文有道) 등을 시켜 세제를 죽이려 하자 이를 탄핵하여 음모를 막았다.
영조가 즉위한 뒤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로 나갔고, 1725년(영조 1) 사서(司書)‧필선(弼善)‧보덕(輔德)‧집의‧헌납(獻納)을 지내고, 1731년 사간‧부응교‧승지를 거쳐 1741년 개성유수가 되었다.
이듬해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로 갔다가 귀국한 뒤 한성부좌윤을 지내고 대사헌‧경기관찰사‧한성부우윤‧공조참판‧동지의금부사를 역임하였다.
1752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과중한 조세부담을 삭감하게 하고 관하지방관들의 부정을 엄격히 처벌하는 등 치적을 올렸다.
영조가 죽자 거듭 왕계(王系)의 정통을 지키는 청렴한 관리로 이름이 높았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江漢集(黃景源)
國朝榜目
淸選考
江漢集(黃景源)
[집필자]
김양수(金良洙)
대표명 | 서명구(徐命九) |
성명 | 서명구(徐命九) |
성명 : "서명구(徐命九)"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2011-01-04 | 문과방목과 大丘徐氏世譜(2003년 간행)를 참고하여 본관을 달성(達城)에서 대구(大丘)로 수정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