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원(李巨源)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AC70C6D0B1685X0 |
자(字) | 이준(而準) |
생년 | 1685(숙종 11) |
졸년 | 1755(영조 31)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한산(韓山)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이봉년(李鳳年) |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거원(李巨源)
1685년(숙종 11)∼1755년(영조 3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이준(彛準, 而準). 대사간 이봉년(李鳳年)의 아들이다.
1717년(숙종 43)에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1722년(경종 2)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어 삼사에 포열(布列)하여 있는 다른 소론들과 함께 노론을 탄핵하는 데 일조를 하였다.
1723년 시강원문학을 지냈고, 이듬해에 홍문관부수찬에 임명되어 이성신(李聖臣)을 탄핵하였으며, 영조 즉위 후 교리에 임명되었다.
이때, 유학 이의연(李義淵)이 신임사화 때 죽은 노론사대신의 신원(伸寃)과 소론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는 소를 올리자 수찬 이진수(李眞洙)와 함께 이의연의 처벌을 진언하고, 김일경(金一鏡)의 구원에 힘써 그해에 파직되었다.
1725년(영조 1)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아 삭출되었다가 곧 지평 이의천(李倚天)의 탄핵으로 영해(寧海)에 유배되었다.
그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1724년 지제교(知製敎)로서 목호룡(睦虎龍)의 『위훈교서(僞勳敎書)』를 지은 것과 김일경의 신구(伸救)에 힘쓴 것이 화가 되어 금고에 처하여졌다.
1731년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의 추천으로 잠시 영남의 감진어사(監賑御史)로 파견되었을 뿐, 영영 중앙정계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였다.
그뒤로도 계속 노론의 비난을 받다가, 1755년 춘천의 역모사건과 심정연(沈鼎衍)의 흉서사건(凶書事件)이 일어나자, 신치운(申致雲)‧박사집(朴師緝)‧심악(沈鍔)‧유수원(柳壽垣) 등과 함께 붙잡혀 친국 후에 효시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광좌(李光佐)‧최석항(崔錫恒)‧조태억(趙泰億) 등은 관작을 추탈당하였다.
1717년(숙종 43)에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1722년(경종 2)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어 삼사에 포열(布列)하여 있는 다른 소론들과 함께 노론을 탄핵하는 데 일조를 하였다.
1723년 시강원문학을 지냈고, 이듬해에 홍문관부수찬에 임명되어 이성신(李聖臣)을 탄핵하였으며, 영조 즉위 후 교리에 임명되었다.
이때, 유학 이의연(李義淵)이 신임사화 때 죽은 노론사대신의 신원(伸寃)과 소론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는 소를 올리자 수찬 이진수(李眞洙)와 함께 이의연의 처벌을 진언하고, 김일경(金一鏡)의 구원에 힘써 그해에 파직되었다.
1725년(영조 1)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아 삭출되었다가 곧 지평 이의천(李倚天)의 탄핵으로 영해(寧海)에 유배되었다.
그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1724년 지제교(知製敎)로서 목호룡(睦虎龍)의 『위훈교서(僞勳敎書)』를 지은 것과 김일경의 신구(伸救)에 힘쓴 것이 화가 되어 금고에 처하여졌다.
1731년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의 추천으로 잠시 영남의 감진어사(監賑御史)로 파견되었을 뿐, 영영 중앙정계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였다.
그뒤로도 계속 노론의 비난을 받다가, 1755년 춘천의 역모사건과 심정연(沈鼎衍)의 흉서사건(凶書事件)이 일어나자, 신치운(申致雲)‧박사집(朴師緝)‧심악(沈鍔)‧유수원(柳壽垣) 등과 함께 붙잡혀 친국 후에 효시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광좌(李光佐)‧최석항(崔錫恒)‧조태억(趙泰億) 등은 관작을 추탈당하였다.
[참고문헌]
景宗實錄
英祖實錄
辛壬紀年提要
闡義昭鑑
黨議通略
英祖實錄
辛壬紀年提要
闡義昭鑑
黨議通略
[집필자]
박광용(朴光用)
명 : "거원(巨源)"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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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