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응수(閔應洙)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BFCC751C218B1684X0 |
자(字) | 성보(聲甫) |
호(號) | 오헌(梧軒) |
시호(諡號) | 문헌(文憲) |
생년 | 1684(숙종 10) |
졸년 | 1750(영조 26)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여흥(驪興)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민진주(閔鎭周) |
[관련정보]
[상세내용]
민응수(閔應洙)
1684년(숙종 10)∼1750년(영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성보(聲甫), 호는 오헌(梧軒). 이조판서 민진주(閔鎭周)의 아들이다.
1710년(숙종 3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715년 주부(主簿)‧정랑(正郞)에 올랐고, 신임사화 때 사직하였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다시 정랑이 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조정랑‧정언 등을 거쳐, 1726년 헌납(獻納)‧사간이 되고, 이듬해 교리(校理)를 지내다가 정미환국으로 파직되었다가,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호서안무사(湖西安撫使) 김재로(金在魯)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군기를 엄정히 하는 등 공을 세워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었다.
그뒤 충청도‧전라도 관찰사를 거쳐 부제학‧대사간‧형조참판 등을 차례로 역임하고, 1733년 사은 겸 동지부사(謝恩兼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대사성‧대사헌이 되고,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1737년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당론(黨論)을 제기한다 하여 파직되었다.
이듬해 평안도관찰사‧대사헌‧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1740년 이조판서, 1743년 예조판서‧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지낸 다음 1746년 형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뒤에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의 관작(官爵) 추탈(追奪)을 상소하다 면직된 채 죽었다.
글씨로도 이름이 높았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1710년(숙종 3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715년 주부(主簿)‧정랑(正郞)에 올랐고, 신임사화 때 사직하였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다시 정랑이 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조정랑‧정언 등을 거쳐, 1726년 헌납(獻納)‧사간이 되고, 이듬해 교리(校理)를 지내다가 정미환국으로 파직되었다가,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호서안무사(湖西安撫使) 김재로(金在魯)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군기를 엄정히 하는 등 공을 세워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었다.
그뒤 충청도‧전라도 관찰사를 거쳐 부제학‧대사간‧형조참판 등을 차례로 역임하고, 1733년 사은 겸 동지부사(謝恩兼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대사성‧대사헌이 되고,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1737년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당론(黨論)을 제기한다 하여 파직되었다.
이듬해 평안도관찰사‧대사헌‧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1740년 이조판서, 1743년 예조판서‧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지낸 다음 1746년 형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뒤에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의 관작(官爵) 추탈(追奪)을 상소하다 면직된 채 죽었다.
글씨로도 이름이 높았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國朝榜目
梅山集
朝鮮書道菁華
國朝榜目
梅山集
朝鮮書道菁華
[이미지]
[집필자]
오갑균(吳甲均)
대표명 | 민응수(閔應洙) |
명 | 응수(應洙) |
성명 | 민응말(閔應沫), 민응수(閔應洙) |
시호 | 문헌공응수(文憲公應洙) |
자 | 성보(聲甫) |
명 : "응수(應洙)"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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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