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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서(尹仁恕)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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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사추(士推)
호(號)타괴(打乖)
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파평(坡平)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윤옥진(尹玉珍)

[상세내용]

윤인서(尹仁恕)
생졸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사추(士推), 호는 타괴(打乖). 윤옥진(尹玉珍)의 아들이다.

1536년(중종 31)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2년뒤 탁영시(擢英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중종김안로(金安老)에 아부하여 홍문관정자가 되었다. 김안로가 축출당하자 외직으로 전임되어 불평을 품고 있었으며, 통천군수로 있을 때에 인종이 후사(後嗣)가 없음에 경원대군(慶源大君: 뒤에 명종)을 세제(世弟)로 책봉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윤임(尹任)파가 방해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尹元衡)에 아부하여 1546년(명종 1) 사헌부장령이 되었으며, 이어 홍문관교리사간성균관사성의정부검상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1549년 승정원동 부승지가 되었으며, 이어 대사간홍문관부제학에 제수되었다. 대간(臺諫)‧시종(侍從)자리에 있으면서 권간(權奸)에 아부하여 직언지사를 모함함을 서슴지 않았으며, 공명을 탐하고 재물에 눈이 어두워 전일의 친구가 하룻밤 사이에 원수가 되었다. 결국, 전일의 친교가 있었던 대간 진복창(陣復昌)의 탄핵을 받아 갑산으로 유배되었다가 어머니의 애절한 상소로 2년 뒤 귀양살이에서 풀려났다.

1554년 의정부참찬에 제수되고, 이어 강원도관찰사예조참판동지중추부사전라도관찰사한성부우윤호조참판을 거쳐 1564년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568년(선조 1) 대호군 재임 중 사헌부의 탄핵으로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榜目
人物志

[집필자]

이재호(李載琥)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