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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정(朴師正)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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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박사성(朴師聖)
자(字)시숙(時叔)
생년1683(숙종 9)
졸년1739(영조 15)
시대조선중기
본관반남(潘南)
활동분야문신 > 문신
박필하(朴弼夏)
증조부박동량(朴東亮)

[관련정보]

[상세내용]

박사정(朴師正)
1683년(숙종 9)∼1739년(영조 1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초명은 사성(師聖), 자는 시숙(時叔). 박동량(朴東亮)의 증손으로, 박필하(朴弼夏)의 아들이다.

1717년(숙종 4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722년(경종 2) 신임사화가 일어나자 맏형 박사익(朴師益)이 소론들의 훈맹(勳盟)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여 조정에서 쫓겨났다.

이에 그는 향리의 집에 숨어 있으면서 몸을 드러내지 않았다. 영조가 즉위하여 노론이 득세하자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이때 신임사화에 희생된 노론 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이이명(李頤命)조태채(趙泰采) 등 4대신의 사당 건립이 논의되었다.

상신(相臣)들은 마땅히 4대신이 수명(受命)한 곳에 각각 건립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나, 그는 한 사당 안에 4대신을 함께 모실 것을 주장하였다.

이어 홍문관에 들어가자, 차자(箚子)를 올려 숙종묘정에 배향된 소론 남구만(南九萬)최석정(崔錫鼎)윤지완(尹趾完) 등을 철향(撤享)하자고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득세함에 따라 파직되었다.

1728년(영조 4) 다시 복직되어 부교리로서 왕에게 언관(言官)들이 근래에 여러가지 일들을 진언하다가 계속 죄를 받고 있는 사실을 들어 그 부당함을 논하고, 이어 사은사(謝恩使)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경산현감(慶山縣監)대사간이조참의도승지 등을 역임하고, 예조참판에 승진하였지만, 당시 소론 이광좌(李光佐)영의정으로 있었기 때문에 끝내 사양하였다.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의 아버지가 되므로 영조가 장차 크게 기용할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뜻밖에 폭질(暴疾)로 죽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藥坡漫錄

[집필자]

이원균(李源鈞)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