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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채(趙泰采)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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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유량(幼亮)
호(號)이우당(二憂堂)
시호(諡號)충익(忠翼)
생년1660(현종 1)
졸년1722(경종 2)
시대조선중기
본관양주(楊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희석(趙禧錫)
조부조계원(趙啓遠)
저서『이우당집』

[상세내용]

조태채(趙泰采)
1660년(현종 1)∼1722년(경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유량(幼亮), 호는 이우당(二憂堂). 형조판서 조계원(趙啓遠)의 손자로, 괴산군수 조희석(趙禧錫)의 아들이다. 조태구(趙泰耉)의 종제이며, 조태억(趙泰億)의 종형이다.

1686년(숙종 12) 별시문과에 종형 조태구와 함께 병과로 급제, 내직으로는 승문원정자저작박사성균관전적직강, 사헌부감찰지평대사헌, 사간원정언헌납대사간, 홍문관수찬교리, 승정원동부승지, 장례원판결사, 한성부판윤, 그리고 육조의 판서, 좌참찬 겸 판의금부사 등을 거쳐, 1717년 좌의정에 이르고 판중추부사에 전직하였다. 외직으로는 옥구현감공주목사평안감사 등을 역임하였다.

1713년 동지사(冬至使)로, 1720년(경종 즉위) 사은사(謝恩使)로 두 차례 청나라에 다녀온 바 있다. 그는 도량이 크고 사려가 깊으며 해학을 즐겨 담론을 잘 하였고, 풍채가 썩 훌륭하였다고 한다. 족질이 대부분 소론에 기운 데 반하여, 유독 노론에 머물렀다.

그는 당시 공론(公論)의 부재현상을 통렬히 비판하였고, 당론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취하였다. 윤선거(尹宣擧)의 문집을 훼판(毁板)하고 이어 그를 배향하던 서원까지 훼철하려 하자, 은액(恩額)만을 철회한다면 다른 일반 향사(鄕祠)와 다를 바 없이 되고, 또 향사는 조정에서 간섭할 바가 아닌 것을 들어 은액만을 철회할 것을 왕에게 진언, 이를 관철시켰다.

이는 당시 정언 성진령(成震齡)의 논핵(論覈)을 받게 되기는 하였으나, 후일 성진령이 후회한바, 당시 정국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던 그의 식견에서 나온 처사라 할 것이다.

경종이 즉위하고 나서 정국은 더욱 혼란해져가는 가운데 정언 이정소(李廷熽)의 건저상소(建儲上疏)를 채택,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판부사 이이명(李頤命),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호조판서 민진원(閔鎭遠) 등과 함께 1721년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의 세제책봉을 건의, 실현시켰으며, 이어 세제의 대리청정까지 이르게 하였다.

그러나 소론인 우의정 조태구의 지휘를 받은 사직(司直) 유봉휘(柳鳳輝)의 건저반대소(建儲反對疏)와 좌참찬 최석항(崔錫恒)의 대리청정 환수(還收)를 청하는 소 등 소론의 적극적인 반대로 대리청정의 명이 철회되고 건저를 주장하였던 노론세력이 대거 정계에서 제거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이해 전 승지 김일경(金一鏡)이 올린 노론 4대신 축출의 소가 승정원에서 채택되어 판중추부사로 있던 그도 그 중 한 사람으로 진도에 유배되고 다음해 적소에서 사사되었다.

1725년(영조 1) 우의정 정호(鄭澔)의 진언으로 복작(復爵)되었으며 절도(絶島)에 나누어 유배되었던 자녀들도 모두 풀려나게 되었다. 그는 조정 안에는 공론이 땅에 떨어지고 함묵(含黙)이 성풍(成風)이 되어가는 실정을 크게 문제삼았으며, 밖으로는 민생의 사활이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는 수령의 현부(賢否)를 중요시하였다.

수령의 어질고 못됨을 가리고 백성의 질고를 살피며, 진휼상황을 감독하는 등 경외(京外)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가까이 모시는 신하 중에서 명망이 있는 자로 하여금 어사로 삼아 파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면서도, 빈번한 어사의 파견은 비용만 낭비하고 감사와 수령의 처지를 손상시킨다 하여 절제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는 노론4대신의 한 사람으로 다양한 경력이 말하듯, 정적도 추종자도 많았지만 어느 한쪽에 크게 기울어짐이 없이 끝까지 대의를 따르려 하였다는 데서 세인의 칭송을 얻을 수 있었다. 과천사충서원(四忠書院)진도봉암사(鳳巖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이우당집』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東國朋黨源流
黨議通略
辛壬提要
昭代紀年
淸選考

[집필자]

김인걸(金仁杰)

명 : "태채(泰采)"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紀年便攷v30趙泰耉泰老弟李有相婿顯宗庚子生字德叟號白門又素軒又霞谷肅宗丙寅登别試與從弟泰采同榜歴銓郞副學判六曹景宗即位庚子入相至領辛丑建儲時從宣仁門潜入力阻大策誣殺金昌集等四大臣癸卯卒年六十
紀年便攷v30歴銓郞副學兵判戶判以通信使誤事被罪景宗朝典文衡為英祖入學傳士壬寅誣殺金昌集等謀危聖躬教文有不道之語以泰采從弟恬然參於正刑之啓人皆曰如彼無人理之人何靣目拜其祖於地下云云泰耉曰吾兄弟布列卿相豈忍見血於同祖之孫
紀年便攷v30癸巳以監役登增廣歴三句官止灣尹景宗壬寅以修撰上䟽曰身為推戴頤命也潛圖密旨昌集也異域毀君健命也首唱聯劄泰采也至於陳兵圍宫圖行廢黜則四凶固一心又請聖復快正王法英祖乙巳因臺啓濟州安置三兄弟文科弟顯良獻納顯望修撰
紀年便攷v30臣諸宰三司會賓廳詳閱鞫案後禀處及諸臣入侍遂命四大臣復官致祭仍不待狀贈昌集諡曰忠獻頤命曰忠文健命曰忠愍泰采曰忠翼晩成等諸臣并復官因儒䟽建祠西湖賜額曰四忠祠
東國歷代總目v02李弘述等以逼東宮虎龍錄扶社勳一鏡擢兵曹判書○昌集壽恒之子後諡忠獻頤命敬輿之孫諡忠文健命頤命從弟諡忠愍泰采諡忠翼
國朝捷錄v01啓遠啓遠之孫泰采
國朝捷錄v01字樂甫楊州人泰采侄丙午拜右泰來子禧錫孫李萬元劾泰來 肅廟朝科號睡窩貪汚至請烹阿 淸禧公
國朝捷錄v01字國賓晦軒工判泰采子僉正成朝孫文簡公
國朝人物志v3無愧怍朝野輯要諡忠獻肅廟昇遐之越三年壬寅忠文李公頤命與金忠獻昌集趙忠翼泰采李忠愍健命同被極禍世所稱四大臣昭代紀年子淸謙
國朝人物志v3號二憂堂楊州人判書啓遠孫肅宗丙寅文科丁酉拜右議政辛丑景宗素有疾且無嗣泰采適出郊聞諫臣疏請建儲促駕入城承召詣闕謂金昌集曰國有長君社稷之福諸大臣旣定策柳鳳輝上疏以
國朝人物志v3叟號素軒楊州人師錫子東芚延安李有相以其女妻之肅宗癸亥生員丙寅文科與從弟泰采同榜歷副提學六曹判書庚子拜右議政至領議政辛丑建儲時泰耇聞李頤命等四
國朝人物志v3字樂甫號休窩楊州人都正泰來子忠翼公泰采侄肅宗辛未進士壬午文科歷吏兵二曹判書英祖丙午拜右議政諡靖僖相臣錄
國朝人物志v3驪興閔鎭厚之女生榮進臨娩忠文公有圓玉夢仍名小字生質沈重文藝夙就時値辛壬之禍從祖忠翼公泰采以建儲大臣首及焉榮進隨父晦身湖海杜門廢擧甲子進士丙子以南原府使擢文科官至刑
國朝人物志v3字元七號心菴楊州人忠翼公泰采五世孫純祖丙戌冬黃柑應製文科歷待敎哲宗朝拜大提學知貢擧有詩曰萬樹濃陰日正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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