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지(李喜之)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D76CC9C0B1681X0 |
자(字) | 사복(士復) |
호(號) | 응재(凝齋) |
생년 | 1681(숙종 7) |
졸년 | 1722(경종 2)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학생 > 유생 |
부 | 이사명(李師命) |
저서 | 『응재집』 |
[상세내용]
이희지(李喜之)
1681년(숙종 7)∼1722년(경종 2). 조선 중기의 유생.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복(士復), 호는 응재(凝齋). 판서 이사명(李師命)의 아들이며, 이명(頤命)의 조카이다.
1721년(경종 1) 경종이 병이 잦고 세자가 없어서 노론의 김창집(金昌集)‧이이명‧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 등 4대신이 연잉군(延礽君)을 세제(世弟)로 책봉하여 대리청정(代理聽政)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노론에 속한 성균관 유생이었는데 이몽인(李夢寅)의 상소로 전라도 장흥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노론 4대신의 처사에 반기를 든 소론의 유봉휘(柳鳳輝)가 왕세제책봉의 불가함을 상소하고, 김일경(金一鏡) 등은 목호룡(睦虎龍)으로 하여금 고변하게 하였는데, 이희지 등이 경종에게 약물을 먹여 시해할 목적으로 궁녀에게 금전을 주었으며 왕을 비방하는 노래를 지었다고 무고하여 큰 옥사가 일어났다.
이 무고로 이희지‧이기지(李器之: 頤命의 아들)‧김성행(金省行: 昌業의 손자) 등 60여명이 투옥되었는데, 그는 형을 여덟 차례나 받고 드디어 장하(杖下)에서 죽었다. 영조 때 신원되었다.
저서로 『응재집』이 있다.
1721년(경종 1) 경종이 병이 잦고 세자가 없어서 노론의 김창집(金昌集)‧이이명‧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 등 4대신이 연잉군(延礽君)을 세제(世弟)로 책봉하여 대리청정(代理聽政)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노론에 속한 성균관 유생이었는데 이몽인(李夢寅)의 상소로 전라도 장흥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노론 4대신의 처사에 반기를 든 소론의 유봉휘(柳鳳輝)가 왕세제책봉의 불가함을 상소하고, 김일경(金一鏡) 등은 목호룡(睦虎龍)으로 하여금 고변하게 하였는데, 이희지 등이 경종에게 약물을 먹여 시해할 목적으로 궁녀에게 금전을 주었으며 왕을 비방하는 노래를 지었다고 무고하여 큰 옥사가 일어났다.
이 무고로 이희지‧이기지(李器之: 頤命의 아들)‧김성행(金省行: 昌業의 손자) 등 60여명이 투옥되었는데, 그는 형을 여덟 차례나 받고 드디어 장하(杖下)에서 죽었다. 영조 때 신원되었다.
저서로 『응재집』이 있다.
[참고문헌]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人物志
英祖實錄
國朝人物志
[집필자]
이재호(李載琥)
명 : "희지(喜之)"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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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