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이우신(李雨臣)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74C6B0C2E0B1670X0
자(字)백열(伯說)
호(號)십탄(十灘)
생년1670(현종 11)
졸년1744(영조 20)
시대조선중기
본관연안(延安)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성조(李成朝)
외조부조상정(趙相靜)

[상세내용]

이우신(李雨臣)
1670년(현종 11)∼1744년(영조 2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백열(伯說), 호는 십탄(十灘). 사복시첨정 이성조(李成朝)의 아들이며, 모친은 증찬성(贈贊成) 조상정(趙相靜)의 딸이다. 이희조(李喜朝)의 문인.

1710년(숙종 36)에 음보로 사산감역관(四山監役官)이 되고, 상의원별제(尙衣院別提)의금부도사를 역임하였다.

1714년 정읍현감이 되어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실시하여 풍속을 순화하였으며, 이후 종묘령(宗廟令)에 승진되었다.

1718년 인제현감이 되어 3세(稅)를 감면하고 선정에 힘쓰자 김창흡(金昌翕)이 글을 지어 칭송하였다. 이후 대구판관으로 옮겨 민폐를 제거하고, 이어 함양군수를 지냈다.

1725년(영조 1) 의성현감으로 나가 흉년의 백성들을 구제하고, 1727년 부평부사에 승진되었다. 이인좌(李麟佐)의 난 후에는 벼슬에 뜻을 버리고 가평으로 내려갔다. 근처에 12탄(灘)이 있었으므로 호를 십탄이라 하였다.

1731년 다시 사복시첨정이 되어 『마의방(馬醫方)』을 간행하고 이를 잘 익힌 자를 마의(馬醫)로 임명하게 하여 이후 준례가 되었다.

1733년 원성현감이 되어서는 향약 12조문을 국문으로 번역하여 백성들이 알기 쉽게 하였다. 순찰사의 보고로 통정(通政)에 승진되고 백성들은 송덕비를 세워 칭찬하였다.

1735년 첨지중추부사오위장돈녕부도정을 역임하고 이듬해 판결사동지중추부사동지돈녕부사한성부우윤도총부부총관을 지냈다. 이어 호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늙은 음관(蔭官)으로 중임을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1743년 부사직이 되었다. 문장에 능하고 특히 변려문(騈儷文)에 뛰어났다.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知守齋集
國朝人物志

[집필자]

김용국(金龍國)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