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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李濡)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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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우(子雨)
호(號)녹천(鹿川)
시호(諡號)혜정(惠定)
생년1645(인조 23)
졸년1721(경종 1)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중휘(李重輝)

[상세내용]

이유(李濡)
1645년(인조 23)∼1721년(경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우(子雨), 호는 녹천(鹿川).

세종의 다섯째아들인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후손이며, 군수 이중휘(李重輝)의 아들이다.

1668년(현종 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설서가 된 이래, 헌납정언지평교리수찬응교 등을 거쳐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재집권함에 승지로 발탁되었다.

이어 경상도관찰사대사헌을 역임하였고, 1694년 갑술환국 후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호조판서가 되었다가, 1702년 양역(良役)사무에 밝다 하여 특별히 병조판서로 임명되면서 이듬해 설치된 양역이정청구관당상을 겸임, 양역변통문제를 담당하여 1704년 오군문개군제급수군변통절목(五軍門改軍制及水軍變通節目)‧군포균역급해서수군변통절목(軍布均役及海西水軍變通節目)‧교생낙강자징포절목(校生落講者徵布節目)을 마련함으로써 조선 후기에 들어와 처음으로 양역사무를 크게 정비하게 하였다.

그 공으로 1704년 우의정에 오르고, 뒤이어 좌의정영의정에까지 승진하였는데 상신(相臣)으로 있으면서 특히 도성방어의 강화를 힘써 주장, 경리청이라는 재정마련의 특별기구까지 설치하여가면서 일부관료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한산성의 수축을 완료하게 하였다.

1718년 영중추부사가 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당대의 경세가로서 특히 양역문제에 큰 관심을 가졌는데 호포론(戶布論)은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고 군문‧군액의 조정과 감축, 군포부담의 균일화와 같은 점진적인 개선책과 교생‧원생(院生) 등의 명목으로 피역하는 자(閑游者)에 대하여 군포를 거두는 유포론(游布論: 校生贖布論)을 주장하였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이단하(李端夏)민정중(閔鼎重)의 아낌을 받고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민진후(閔鎭厚) 등과 친하였다.

1726년(영조 2) 민진후와 함께 경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혜정(惠定)이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이미지]

[집필자]

정만조(鄭萬祚)

명 : "유(濡)"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紀年便攷v30李顯章澤子從姪字誠甫肅宗癸巳以監役登增廣歴三句官止灣尹景宗壬寅以修撰上䟽曰身為推戴頤命也潛圖密旨昌集也異域毀君
桐巢漫錄v2未知聖心何以思量上曰入診時予發端而大臣以我世宗 事陳達卽今予病若是世子聽政是予本意而更招左相盖由於此 曰乙酉欲爲傳禪時小臣以世子在傍叅決漸習國事調養聖躬爲達卽今淺慮不過如斯上曰左相入對時已悉予意乙酉傳
三官記v1上曰予曾以加卜事慘被誣衊而今玆歷卜出於愼簡之意如崔奎瑞不識分義之人乃入其中實是萬萬意外仍問可卜者有幾以徐宗泰趙泰采李頤命金昌集爲對命出外更卜右遂擧趙泰采望單才入有卜相後日爲之之敎俄下備忘以爲枚卜國之重
三官記v1有卜相之命右相李濡獨詣賓廳初卜卜洪受瀗再卜卜崔奎瑞又命加卜求對仰問上意所注上曰予曾以加卜事慘被誣衊而今玆歷卜出於愼簡之意如崔奎瑞不識分義之人乃入其中實是萬萬意
野乘v27黨人随事折之如此時人見行義輒目之以新垣平○有卜相之命右相李濡獨詣賓㕔初卜卜洪受瀗再卜卜崔奎瑞又命加卜求對仰問上意所注上曰予曾以加卜事慘被誣衊而今兹歴卜出於慎簡之意如崔奎瑞不識分義之人乃入於其中實是萬萬
永禧殿志v1蓋是自前巳有之痕矣上曰今番始有所報而如此者巳久則奉審後仍置殊爲為未安使善手匠人善㨾修補去其白色則好矣曰今此修補之擧舉固爲為重難而奉審後仍置未安故雖當善㨾修補始役之後宜冝有更審稟達之事更審後則可以詳知形
璿源譜略修正時儀軌v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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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