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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만웅(孫萬雄)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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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적만(敵萬)
호(號)야촌(野村)
생년1643(인조 21)
졸년1712(숙종 38)
시대조선중기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손신의(孫愼儀)
외조부이심근(李深根)

[상세내용]

손만웅(孫萬雄)
1643년(인조 21)∼1712년(숙종 3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적만(敵萬), 호는 야촌(野村).

부친은 손신의(孫愼儀)이며, 모친은 이심근(李深根)의 딸이다.

1669년(현종 10)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해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크게 명성을 떨치고 성균관에 등용되어 오수찰방(獒樹察訪)전적을 거쳐 공조예조형조좌랑을 지냈다.

1674년 현종이 죽었을 때 도감랑(都監郞)으로서 모든 일을 순서있게 처리하자 당상관들이 그 재주를 칭찬하고 일마다 그와 의논하여 행하였다.

1675년(숙종 1) 병조좌랑에서 영광군수로 내려가 선정을 베풀었다. 정언호조정랑춘추관기사관을 거쳐 지평으로 있을 때 김수흥(金壽興)을 서용하려고 하자 자의대비복제문제(慈懿大妃服制問題)에서 그가 효종을 ‘체이부정(體而不正)’이라고 하여 파직당하였던 죄목을 내세워 조리정연하게 논핵(論劾)하여 취소시켰다.

1677년 사예동지사서장관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뒤 사도시정(司䆃寺正)장령공주목사나주목사괴산군수 등을 역임하였으나, 가정이 빈한하여 서책과 장복(章服)을 팔아서 부모를 봉양하였으며, 청주목사에 제수되었다가 파직되었는데 대신들이 상주하여 유임되었다.

그뒤 동래부사를 거쳐 경주부윤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荷塘先生文集
嶺南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최호균(崔豪鈞)
대표명손만웅(孫萬雄)
성명손만웅(孫萬䧺), 손만웅(孫萬雄)

성명 : "손만웅(孫萬䧺)"에 대한 용례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