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이만상(李萬相)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74B9CCC0C1B1622X0
자(字)상여(相如)
호(號)금곡(琴谷)
생년1622(광해군 14)
졸년1645(인조 23)
시대조선중기
본관연안(延安)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명한(李明漢)
조부이정귀(李廷龜)

[상세내용]

이만상(李萬相)
1622년(광해군 14)∼1645년(인조 23).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상여(相如), 호는 금곡(琴谷).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조부는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이고, 부는 대제학을 지낸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이다.

형제로는 두 형과 아우가 있다. 먼저 맏형 청호(靑湖) 이일상(李一相)효종(孝宗)대제학을 거쳐 현종(玄宗)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냈으며, 둘째 형 이가상(李嘉相)은 효자로 이름을 남겨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그리고 동생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의 장인으로, 인조(仁祖) 때 문과에 급제하고, 효종호당(湖堂)을 거쳐 관직이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사퇴 이후에는 양주(楊洲)에서 학문에 전념하여 수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그는 1642년(인조 20)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는데, 당시 부친이 시험관으로 있었다. 모든 사람이 그가 1등을 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시사(試士)를 관장하던 부친은 중의(衆議)를 물리치고 아들 이만상을 2등에 두었다고 전한다.

천품이 수미(粹美)하고 헌할(軒轄)하여 어려서부터 대기(大器)로 칭찬 받았고, 남보다 총명하여 아무리 긴 문장이라도 한 번 보면 다 기억하고 외웠으며, 시문(詩文) 또한 아려(雅麗)하고 풍도(風度)가 있었다. 부친의 병구완에 마음을 쓰다가 친상(親喪)에 몸을 상하여 요절(夭折)하고 말았다.

[참고문헌]

朝鮮人名辭書
海東人物志

[집필자]

이채경
수정일수정내역
2008-12-31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