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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정(金世鼎)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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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중(子重)
생년1620(광해군 12)
졸년1686(숙종 12)
시대조선중기
본관광산(光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효성(金孝誠)

[상세내용]

김세정(金世鼎)
1620년(광해군 12)∼1686년(숙종 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자중(子重).

부친은 목사 김효성(金孝誠)이다. 서인계의 인물로서 1650년(효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부터 효릉참봉의금부도사빙고별검(氷庫別檢) 등을 지냈다.

165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승문원박사성균관전적병조좌랑을 거쳐 영덕현령으로 나갔다. 임지에서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하여 백성들의 잡세를 격감시키고, 학문을 진작하며 빈민을 구제하는 데 힘썼다.

왕족이었던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枏: 인평대군의 아들) 형제가 세력을 믿고 남의 노비 수백명을 약탈하여 물의를 빚었으나 여러 해 송사가 해결되지 못하였는데, 그 일을 맡아 처결하여 불법으로 빼앗은 노비들을 모두 원주인에게 돌려보냈다. 이 일로 그들에게 노여움을 사 현령직에서 파면되었다.

그뒤 병조좌랑병조정랑정언지평시강원사서‧문학을 거쳐 장성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직강사예종부시정(宗簿寺正)을 역임하고 숙종초 남인정권하에서는 남양현감‧가산군수장흥현감 등 말단외직으로 전전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득세하자 장령으로 발탁되었으나, 남인들의 처벌에 온건한 입장을 표방했다가 체직되었다. 광주목사로 나갔다가 다시 장령이 되어 호포법(戶布法)의 실시에 반대하여 물러났고, 온성부사‧무주부사김해부사헌납집의우부승지를 끝으로 관직생활을 마쳤다.

성품이 매우 강직하여 권세에 동요되지 않았고 이익과 명예를 탐하지 않았으며, 일을 논함에는 강개하였으나 처분은 온건하였고 지방관으로서 선정을 베풀었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南溪集
壺谷集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윤용혁(尹龍爀)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