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일(金宗一)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C885C77CB1597X0 |
자(字) | 관지(貫之) |
호(號) | 노암(魯庵) |
생년 | 1597(선조 30) |
졸년 | 1675(숙종 1)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경주(慶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김경룡(金慶龍) |
저서 | 『노암문집』 |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종일(金宗一)
1597년(선조 30)∼1675년(숙종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관지(貫之), 호는 노암(魯庵).
부친은 김경룡(金慶龍)이다. 신지제(申之悌)‧정경세(鄭經世)‧이명준(李名俊)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24년(인조 2) 생원시‧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628년 정언이 되고, 1630년 지평을 거쳐 진주목사가 되었다.
1635년 다시 정언이 되었으며,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순찰사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일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가장 먼저 패전의 책임을 들어 김류(金瑬)‧윤방(尹昉) 등을 탄핵하였으며, 이듬해 직강‧지평을 지냈다.
그해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갈 때 사서로서 수행하였다.
당시, 조선인으로서 청나라에 잡혀간 뒤 벼슬에 올라 조선에 대해 갖은 횡포를 부리던 정명수(鄭命壽)‧김돌(金突) 등을 청나라로 하여금 제거하게 하는 계획을 정뇌경(鄭雷卿)과 함께 세웠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송환되어 영덕으로 유배되었다.
1643년에 풀려나 1651년(효종 2) 수찬이 되고, 교리를 거쳐 1657년 울산부사를 지냈다.
1660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효종상복에 대해 허목(許穆)과 함께 3년설을 주장하여 평해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저서로 『노암문집』이 있다.
부친은 김경룡(金慶龍)이다. 신지제(申之悌)‧정경세(鄭經世)‧이명준(李名俊)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24년(인조 2) 생원시‧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628년 정언이 되고, 1630년 지평을 거쳐 진주목사가 되었다.
1635년 다시 정언이 되었으며,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순찰사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일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가장 먼저 패전의 책임을 들어 김류(金瑬)‧윤방(尹昉) 등을 탄핵하였으며, 이듬해 직강‧지평을 지냈다.
그해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갈 때 사서로서 수행하였다.
당시, 조선인으로서 청나라에 잡혀간 뒤 벼슬에 올라 조선에 대해 갖은 횡포를 부리던 정명수(鄭命壽)‧김돌(金突) 등을 청나라로 하여금 제거하게 하는 계획을 정뇌경(鄭雷卿)과 함께 세웠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송환되어 영덕으로 유배되었다.
1643년에 풀려나 1651년(효종 2) 수찬이 되고, 교리를 거쳐 1657년 울산부사를 지냈다.
1660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효종상복에 대해 허목(許穆)과 함께 3년설을 주장하여 평해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저서로 『노암문집』이 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淸選考
孝宗實錄
顯宗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淸選考
[집필자]
오성(吳星)
명 : "종일(宗一)"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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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