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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기(具仁墍)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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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계의(季依)
시호(諡號)충간(忠簡)
생년1597(선조 30)
졸년1676(숙종 2)
시대조선중기
본관능성(綾城)
활동분야문신 > 문신
구굉(具宏)
공신호정사공신(靖社功臣)

[관련정보]

[상세내용]

구인기(具仁墍)
1597년(선조 30)∼1676년(숙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계의(季依).

부친은 능성부원군(綾城府院君) 구굉(具宏)이다. 큰아버지 구성(具宬)의 문인이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함께 공부하였으며, 인조의 어머니 인헌왕후(仁獻王后)는 고모가 된다. 광해군이 점술인의 말을 듣고 인조의 동생인 능창군을 죽이자 친척들이 화를 두려워하여 출입하지 않을 때에도 여전히 내왕하였으며, 인조반정에 참여하였다.

인조즉위 이후 아버지와 함께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이어서 사헌부감찰에 제수되었고, 군자감판관충훈부도사선공감첨정홍천현감김제군수 등의 내외직을 거쳤다.

1640년(인조 18)에 첨지중추부사로 심양관(瀋陽館)에 파견되었고, 돌아와 1645년 수원부사가 되고 능풍군(綾豊君)에 봉해졌으며, 그뒤에 한성부좌윤공조참판총융사 등을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이후 병을 핑계삼아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지냈으며, 1675년에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다. 인조반정에 처음부터 깊이 관여하여 반정하던 날 인조를 사저에서 직접 모셔 즉위하게 하였다. 병자호란 이후에 심양에 파견되어서는 울분을 참지 못하여 문밖 출입을 일체 하지 않았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肅宗實錄
國朝人物考

[이미지]

[집필자]

이태진(李泰鎭)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