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해(金應海)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C751D574B1588X0 |
자(字) | 군서(君瑞) |
생년 | 1588(선조 21) |
졸년 | 1666(현종 7)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안동(安東[舊]) |
활동분야 | 무신 > 무신 |
[상세내용]
김응해(金應海)
1588년(선조 21)∼1666년(현종 7).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安東[舊]). 자는 군서(君瑞). 고려의 명장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이며, 김응하(金應河)의 아우이다.
1616년(광해군 8)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희천군수(熙川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1619년 명나라의 요청으로 후금(後金) 정벌에 도원수 강홍립(姜弘立) 등을 파견하자, 형 김응하와 함께 출정하기를 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620년에 강계부사‧부령부사‧인동부사‧정주부사 등을 지내는 동안 청렴결백하여 칭찬을 많이 들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별장으로 정방산성(正方山城)을 지켰다.
그러나 적병이 곧장 서울을 공격하자 그는 3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진로를 막고 고군분투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적에게 포위되자 자결하려 하였으나 살아났다.
그뒤 1647년 어영대장(御營大將)에 올랐다. 형제가 모두 무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1616년(광해군 8)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희천군수(熙川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1619년 명나라의 요청으로 후금(後金) 정벌에 도원수 강홍립(姜弘立) 등을 파견하자, 형 김응하와 함께 출정하기를 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620년에 강계부사‧부령부사‧인동부사‧정주부사 등을 지내는 동안 청렴결백하여 칭찬을 많이 들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별장으로 정방산성(正方山城)을 지켰다.
그러나 적병이 곧장 서울을 공격하자 그는 3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진로를 막고 고군분투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적에게 포위되자 자결하려 하였으나 살아났다.
그뒤 1647년 어영대장(御營大將)에 올랐다. 형제가 모두 무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耳溪集
耳溪集
[집필자]
조계찬(趙啓纘)
명 : "응해(應海)"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