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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급(韓仁及)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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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원지(元之)
호(號)서석(瑞石)
생년1583(선조 16)
졸년1644(인조 22)
시대조선중기
본관청주(淸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한응인(韓應寅)
외조부이담령(李聃齡)

[상세내용]

한인급(韓仁及)
1583년(선조 16)∼1644년(인조 22). 조선 후기의 문신‧서화가.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원지(元之), 호는 현석(玄石)서석(瑞石).

부친은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우의정 한응인(韓應寅)이며, 모친은 부사과 이담령(李聃齡)의 딸이다.

1601년(선조 34) 진사시에 합격하고,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정원에 들어가고, 다음해 검열대교봉교 등을 거쳐, 전적으로서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여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뒤 정언사서수찬 등을 거쳤다.

1613년 아버지가 선조의 유교칠신(遺敎七臣) 중 한 사람으로 계축옥사에 연루되자 사직하고, 뒤이어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보령에 퇴거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병조좌랑이 되고, 수찬에 이르러 신인 등용책을 논의하였다. 이어 종성부사부총관(副摠管)한성부우윤지중추부사형조판서개성유수 등을 거쳐, 1643년 지돈녕부사가 되어 치사(致仕)하였다.

홍문관에 있을 때에는 자주 경연(經筵)을 열었고, 세자책봉주청사(世子冊封奏請使)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병자호란을 당하여서는 개성유수로서 강화도에 피난하였다가 이듬해 환도하였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여 뒤에 언관으로부터 직무유기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한편, 이괄(李适)의 난 때는 삼도독향어사(三道督餉御使)가 되어 군량을 조달하였고, 만년에는 지돈녕부사로서 진향부사(進香副使)가 되어 인평대군(麟坪大君)을 따라 심양(瀋陽)에 자주 다녀왔다. 서예에 뛰어나 팔법(八法)에 능하였으며, 이 때문에 당시 태학(太學)의 장소(章疏)‧비문(碑文), 나라의 묘주(廟主) 등에 거의 그의 붓을 빌렸다 한다.

작품으로는 글씨로 우상한응인묘비(右相韓應寅墓碑)가 있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淸陰集
朝鮮金石總覽

[집필자]

최승희(崔承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