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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배(李義培)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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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의백(宜伯)
시호(諡號)충장(忠壯)
생년1576(선조 9)
졸년1637(인조 15)
시대조선중기
본관한산(韓山)
활동분야무신 > 무신
이흡(李洽)
여흥이씨(驪興李氏)
조부이흥준(李興埈)
외조부이우직(李友直)

[상세내용]

이의배(李義培)
1576년(선조 9)∼1637년(인조 15).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의백(宜伯). 본관은 한산(韓山).

동지중추(同知中樞) 한양군(韓陽君) 이흥준(李興埈)의 손자으로, 장령 이흡(李洽)의 아들이며, 모친은 여흥이씨(驪興李氏)예조판서 이우직(李友直)의 딸이다.

1599년(선조 32)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제배되고 이어 감찰로 전임되었다. 이 무렵은 임란왜군이 겨우 철수한 때라서, 연해(沿海)수령을 선임할 때 보령현감으로 발탁되었으나 나이가 어리다 하여 교체되었다.

광해군 혼정(昏政) 때에는 출사하지 않다가 1623년 인조반정에 앞서 정사(靖社)의 밀모에 가담하여 반정 후에 훈책되어 통정(通政)으로 승진되고 명천부사에 제수되었다.

이괄(李适)의 난 후 전라좌수사로 승진되었다. 이어 인동부사로 전임되고, 1630년(인조 8) 한천군(韓川君)으로 훈봉되었으며, 공청병마절도사(公淸兵馬節度使)김해부사를 역임한 뒤 전라병사로 승진, 오위도총부부총관, 황해평안함경도 등의 병사를 역임하고, 1635년에 공청병마절도사로 다시 부임하여 그곳에서 병자호란을 맞았다.

적변(敵變)을 듣고 남한산성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가기 위하여 창졸간에 임지 부근의 속오병(束伍兵) 수천명을 겨우 모아 출전을 서둘렀다.

가사를 동생에게 맡기고 부인에게 백주(白紬)로 행전을 만들게 하여 청금(靑錦)으로 바지 속 양 다리에 동여매니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묻는 말에 “임전에 사생을 알 수 없는데, 후일 이것으로써 알아차리게 함이다.”하고 결연히 고군(孤軍)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향하였다.

광주(廣州)부근 죽산에 당도하여 다음날 남한산성으로 향발하다가 전봉장 이차형(李次衡)이근영(李根永)이 적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고 중과부적이 되자, 영남근왕병(嶺南勤王兵)의 합류를 기다렸다가 다시 진격하였다.

경상좌절도사 허완(許完)우절도사 민영(閔栐)의 군과 함께 광주 쌍령에 정족(鼎足)으로 진을 치니, 적이 먼저 좌군을 공격, 치열한 접전 끝에 아군이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무너지자 비장(裨將)의 피신권유를 물리친 채 살아남은 노비 축생(丑生)과 역진복지(力盡卜地)하여 전사하였다.

이 싸움에서 허완민영 등 양 절도사도 함께 전사하였다. 조정에서는 후일 이들의 공을 가상히 여겨 이의배 부자 및 허완민영 등 양 절도사, 노비 축생을 일체(一體)로 정려하였고, 이의배는 처음에 병조판서로 추증하였다가 다시 영의정으로 승격 추증하였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집필자]

반윤홍(潘允洪)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0-03-21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 撰 韓川君李公諡狀을 참고하여 본관을 한산(韓山)으로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