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홍명원(洪命元)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D64DBA85C6D0B1573X0
이명(異名)장덕군자(長德君子)
자(字)낙부(樂夫)
호(號)해봉(海峰)
생년1573(선조 6)
졸년1623(인조 1)
시대조선중기
본관남양(南陽[唐])
활동분야문신 > 문신
홍영필(洪永弼)
외조부조수(趙琇)
저서『해봉집』

[상세내용]

홍명원(洪命元)
1573년(선조 6)∼1623년(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唐]). 자는 낙부(樂夫), 호는 해봉(海峰).

부친은 진사 홍영필(洪永弼)이며, 모친은 경력 조수(趙琇)의 딸이다.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에 들어가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시강원(侍講院)설서사서를 거쳐 헌납이 되어 권신을 비난하다가 쫓겨나 함경도도사로 3년을 지내고 돌아와 1603년 예조정랑이 되었다. 다시 외직으로 나가 죽주부사가 되었으며 내직으로 들어와 수찬필선장령을 역임하고 이항복(李恒福)의 천거로 통정계에 승진, 정주목사의주부윤이 되어 서로(西路)의 잔폐를 구제하는 데 공헌하였다.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모친을 모시기 위하여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자청, 그 치적이 나타났으므로 표창을 받고 가선계에 올랐다.

이때 광해군후금과의 수호관계가 명나라에 알려지자 급고사(急告使)로서 명나라에 가서 이를 무마시키고 돌아왔다.

한편, 후금에서 누차 조선을 위협하자 조정의 의론이 분분하였으나 그는 단연 배금(排金)을 주장하였다.

인조반정 후 흉도들이 경기 부근에서 난을 일으키려 하자 경기관찰사가 되어 이를 진정시켰다. 벼슬하기 27년 동안 위형(威刑)을 쓰지 않고 공정하게 다스렸으므로 사람들이 다 경복하였다. 박엽(朴燁)정준(鄭遵)이 서임(西任)을 맡고 있을 때 총애를 믿고 교만 방자하여 많은 사람들을 침탈했으나, 그에 대해서는 감히 소홀히 대하지 못하였다.

또한 중국에 갔을 때에는 학사들이 그를 장덕군자(長德君子)라고도 칭하였다.

문장과 시에 뛰어나 문장은 양한(兩漢)을 주로 하고, 시는 성당(盛唐)을 주로 하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또 그 아들의 공로로 찬성이 가증(加贈)되었다.

저서로 『해봉집』 3권 3책이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집필자]

최승희(崔承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