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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훤(尹暄)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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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차야(次野)
호(號)백사(白沙)
생년1573(선조 6)
졸년1627(인조 5)
시대조선중기
본관해평(海平)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윤두수(尹斗壽)

[상세내용]

윤훤(尹暄)
1573년(선조 6)∼1627년(인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차야(次野), 호는 백사(白沙).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의 아들이다.

형인 영의정 윤방(尹昉)을 비롯한 네 형제가 모두 높은 관직에 진출하였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90년(선조 23) 진사시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1597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관이 되었다.

1599년 호조좌랑을 거쳐 1605년 동래부사를 역임하였다.

1611년(광해군 3) 황해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대북세력을 제거하려 하였다는 죄명으로 압송되는 김직재(金直哉)를 후대하였다 하여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뒤 복관되어 1617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고, 1624년(인조 2)에는 주청부사(奏請副使)명나라에 다녀왔다.

1625년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한 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부체찰사(副體察使)를 겸직하여 적과 싸웠다.

그러나 안주를 빼앗긴 뒤 평양에서 싸우고자 하였지만 병력과 장비의 부족으로 종사관(從事官) 홍명구(洪命耉)의 건의를 받아들여 다시 성천으로 후퇴하였다. 이로 인하여 황해병사 정호서(丁好恕)도 싸우지 않고 황주를 포기하는 등, 전세를 불리하게 하였다는 죄로 체포되어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윤방을 비롯하여 조카 윤신지(尹新之)의 아내이며 인조의 고모인 정혜옹주(貞惠翁主)가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강화도에서 효수되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집필자]

조계찬(趙啓纘)

명 : "훤(暄)"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見睫錄v4至死而上以其族盛必欲殺而威衆臺諫雖困例論殺內實不忍約以明日停啓上知之遽下允旨時方與沈命世對奕命世痛哭徐答曰事已至此奈何遂就刑人多冤之丁好恕以同罪只流竄其餘債事之將俱無所責當時典刑之無常如此金尙憲時赴京
小華龜鑑v19字仲和號白下白沙玄孫吏判
大事編年v10待變平安監司尹暄賊兵已迫不爲戒嚴軍民盡散暄棄平壤而遁黃海兵使丁好恕聞之亦棄黃州報至朝廷震駭以金起宗代爲監司申景瑗代以興爲兵使李榏代好恕爲黃海兵使遣都事拿來喧好恕以鄭忠信爲兵使兼副元帥
大事編年v10領相族黨多連內族其罪本不至死而上以族盛必欲殺而威衆臺諫雖因例論殺內實不忍約以明日停啓上知之遽下允旨時方與沈命世對棋猝聞允命命世慟哭暄徐曰事已至此奈何遂就刑入多冤之金尙憲時赴京還語人曰朝論不明使尹次野見
大事編年v10以族盛必欲殺而威衆臺諫雖因例論殺內實不忍約以明日停啓上知之遽下允旨時暄方與沈命世對棋猝聞允命命世慟哭徐曰事已至此奈何遂就刑入多冤之金尙憲時赴京還語人曰朝論不明使尹次野見殺此朋友之羞也臺諫幷請誅好恕而上
大事編年v10十六日梟尹暄于江都安置丁好恕于境城○兄昉時爲領相族黨多連內族其罪本不至死而上以族盛必欲殺而威衆臺諫雖因例論殺內實不忍約以明日停啓上知之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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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