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우(徐景雨)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11CACBDC6B0B1573X0 |
자(字) | 시백(施伯) |
호(號) | 만사(晩沙) |
생년 | 1573(선조 6) |
졸년 | 1645(인조 23)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대구(大丘)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서성(徐渻) |
[관련정보]
[상세내용]
서경우(徐景雨)
1573년(선조 6)∼1645년(인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시백(施伯), 호는 만사(晩沙).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서성(徐渻)의 아들이다.
1612년(광해군 4) 정주목사(定州牧使)가 되었으나 다음해 선조의 유교(遺敎)를 받은 신하들이 배척될 때 아버지가 유배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10년간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기용되어 1625년(인조 3) 예조참의‧승지 등을 지냈다.
이듬해 대사간이 되고 1627년의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로 왕을 호종하였고, 1630년 좌승지를 거쳐 다시 대사간‧대사헌‧경기감사‧대사성‧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43년 형조판서로서 성절 겸 진하사(聖節兼進賀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우의정에 승진하였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병으로 1645년 은퇴할 것을 청원하여 판중추부사의 한직을 맡았다.
1612년(광해군 4) 정주목사(定州牧使)가 되었으나 다음해 선조의 유교(遺敎)를 받은 신하들이 배척될 때 아버지가 유배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10년간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기용되어 1625년(인조 3) 예조참의‧승지 등을 지냈다.
이듬해 대사간이 되고 1627년의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로 왕을 호종하였고, 1630년 좌승지를 거쳐 다시 대사간‧대사헌‧경기감사‧대사성‧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43년 형조판서로서 성절 겸 진하사(聖節兼進賀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우의정에 승진하였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병으로 1645년 은퇴할 것을 청원하여 판중추부사의 한직을 맡았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집필자]
김동수(金東洙)
명 : "경우(景雨)"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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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2011-01-03 | 문과방목과 大丘徐氏世譜(2003년 간행)를 참고하여 본관을 달성(達城)에서 대구(大丘)로 수정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