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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덕헌(羅德憲)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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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헌지(憲之)
호(號)장암(壯巖)
시호(諡號)충렬(忠烈)
생년1573(선조 6)
졸년1640(인조 18)
시대조선중기
본관나주(羅州)
활동분야무신 > 무신
나사침(羅士忱)

[관련정보]

[상세내용]

나덕헌(羅德憲)
1573년(선조 6)∼1640년(인조 18).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헌지(憲之), 호는 장암(壯巖).

부친은 이성현감(尼城縣監) 나사침(羅士忱)이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거쳐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 장만(張晩)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특히, 안현전투(鞍峴戰鬪)에서는 큰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에 봉해졌다. 외교적 수완이 능하여 여러 차례 심양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이후 길주목사(吉州牧使)를 거쳐 1635년에는 창성부사(昌城府使)의주부윤을 역임하고, 1636년 춘신사(春信使)로 다시 심양에 갔는데 동지(同知) 이곽(李廓)심양에 도착하자, 후금태종은 국호를 청(淸)이라 고치고 황제(皇帝)를 칭하며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그때 우리나라 사신에게도 경축반열에 참석하라고 하였으나, 하례를 완강히 거부하다가 옷이 찢어지고 갓이 부서지는 구타를 당하였다. 구타와 회유를 거듭하여도 시종 거부하다가, 청나라가 볼모를 요구하는 국서를 주어 돌려보내기로 하자, 내용을 알기 전에는 받을 수 없다고 받지 않았다.

100여명의 기병으로 통원보(通院堡)까지 호송되었는데, 기병의 호위가 풀리자 통원보의 호인(胡人)에게 국서를 맡기고 귀국하였다. 이 사실을 안 삼사(三司)조복양(趙復陽)을 중심으로 한 관학유생들은 황제참칭(皇帝僭稱)의 국서를 받았다 하여 논핵하였다.

영의정 김류(金瑬)까지 가세한 조정의 거센 척화론으로 위기에 몰렸으나, 이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의 적절한 변호로 극형만은 면하고 백마산성(白馬山城)으로 유배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후 과거 춘신사심양에 가서 하례를 거부, 항거한 사실이 밝혀져 유배에서 풀려나 삼도통어사로 특진되었으며, 1639년 벼슬에서 물러났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丙子錄
燃藜室記述

[집필자]

유영박(柳永博)
대표명나덕헌(羅德憲)
덕헌(德憲)
성명나덕헌(羅德憲)
시호충렬(忠烈)
헌지(憲之)
장암(壯巖)

명 : "덕헌(德憲)"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國朝編年v12等之罪又曰前縣監羅士忱與其子德明德峻德潤伸救汝立以告者爲誣告場中借述與賊私語之跡而又德明等使其弟德顯德憲等有作亂多士之事又曰鄭仁弘與汝立情意甚篤合爲一體又曰癸未三司之攻數賢也有一臺臣念上有不豫色欲停論洪汝
震史記略v4來爲諱○春信使羅德憲李廓至虜中金汗䝱脅令參拜廓等以死爭之終不免羅拜呼萬歲關西儒生上疏請斬兩司交章請斬德憲白馬山城廓劍山山城充軍○完城君崔鳴吉上疏略曰旣不決戰守之計又不爲緩和之謀一朝虜騎長驅不過體臣入于江都
記聞v6不免羅拜呼歲云還到義州平安道儒生等上疏請丞下尙方斬馬劍斬二人頭示境上入送瀋陽以爲振作之擧下備局拿來罷德憲等院啓請斬羅德憲李廓等上以爲不待結末經先梟示似爲未安三司百官館學儒生連疏請斬不許德憲白馬山城廓劍山山
記聞v6之擧下備局拿來罷德憲等院啓請斬羅德憲李廓等上以爲不待結末經先梟示似爲未安三司百官館學儒生連疏請斬不許德憲白馬山城廓劍山山城徒三年定配○備忘記胡虜僭號之後慢侮我國比前益甚我以數千里封强豈可一向畏縮坐受其困辱
韓史綮v2知其情奏言廓等旣受其書則其屈膝明矣棄之中道何益宜梟示國人判書金尙憲不可曰兩使不騐問奈何獨先斬之於是謫德憲于白馬山城廓于宣川○以金瑬爲領議政○時大司諫尹煌參議金德誠等爭進禦淸之議秋九月崔鳴吉見王屛左右言曰以
國朝人物志v3省曾子甲子進士癸酉文科歷三司丙子淸人僭號我國行人羅德憲等參其賀班而歸榥以正言疏陳請斬德憲等以明大義丁丑爲湖西巡檢使尋以斥和編配丹陽旣蒙放不欲涉跡於世仍居焉官至全羅監司諡
國朝人物志v3境上於是三司及太學生交章請誅金文正公尙憲力言兩使不驗問奈何獨先斬之賴得末減公謫宣川德憲戍白馬城久之朝廷得都督沈世魁奏始知公等抗義狀兩司姑停梟首之啓釋公等謫是年冬滿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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