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군(錦山君)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08C0B0AD70B1570X0 |
이명(異名) | 이성윤(李誠胤) |
자(字) | 경실(景實) |
호(號) | 호기(互棄) |
시호(諡號) | 충정(忠貞) |
생년 | 1570(선조 3) |
졸년 | 1620(광해군 12)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왕실 > 종친 |

부 | 이간(李侃) |

[상세내용]
금산군(錦山君)
1570년(선조 3)∼1620년(광해군 12). 조선 중기의 종실.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성윤(李誠胤), 자는 경실(景實), 호는 매창(梅窗)‧호기(互棄). 성종의 4세손으로, 부친은 청원도정(靑原都正) 이간(李侃)이다.
1584년(선조 17)에 왕족의 통례대로 금산수(錦山守)에 봉해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였으며, 조신들이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땅에 묻고 파천하려 하는 것을 극력 반대하여 저지하였다.
광해군이 세자에 책봉되고 분조(分朝)가 실시되자 선전관에 임명되어 이를 보좌하였다. 선조가 죽은 뒤에 혼전(魂殿)을 수호하여 도정에 올랐고, 이어서 광해군에 의하여 분조 때 호종한 공으로 금산군에 봉해졌다.
1617년(광해군 9) 대북세력의 전횡이 심해지고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이 일어나자 구천군(龜川君) 이수(李晬)와 함께 종실의 상소를 주도하여, 이이첨(李爾瞻)의 비행을 공격하고 윤선도(尹善道)를 두둔하였다.
이로 인하여 대북세력의 탄핵을 받고 왕의 노여움을 사 남해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죽었다.
죽은 뒤 곧 관작이 복구되었고, 인조반정 이후에는 계속 포상을 받아 관작이 높아졌다.
종형 이경윤(李慶胤)과 함께 서화로 유명했는데, 이경윤이 그림에 능한 데 비해 그는 글씨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1584년(선조 17)에 왕족의 통례대로 금산수(錦山守)에 봉해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였으며, 조신들이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땅에 묻고 파천하려 하는 것을 극력 반대하여 저지하였다.
광해군이 세자에 책봉되고 분조(分朝)가 실시되자 선전관에 임명되어 이를 보좌하였다. 선조가 죽은 뒤에 혼전(魂殿)을 수호하여 도정에 올랐고, 이어서 광해군에 의하여 분조 때 호종한 공으로 금산군에 봉해졌다.
1617년(광해군 9) 대북세력의 전횡이 심해지고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이 일어나자 구천군(龜川君) 이수(李晬)와 함께 종실의 상소를 주도하여, 이이첨(李爾瞻)의 비행을 공격하고 윤선도(尹善道)를 두둔하였다.
이로 인하여 대북세력의 탄핵을 받고 왕의 노여움을 사 남해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죽었다.
죽은 뒤 곧 관작이 복구되었고, 인조반정 이후에는 계속 포상을 받아 관작이 높아졌다.
종형 이경윤(李慶胤)과 함께 서화로 유명했는데, 이경윤이 그림에 능한 데 비해 그는 글씨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顯宗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大東野乘
仁祖實錄
顯宗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大東野乘
[집필자]
장동익(張東翼)
봉호 : "금산군(錦山君)"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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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