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이유징(李幼澄)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74C720C9D5B1562X0
자(字)징원(澄源)
시호(諡號)정민(貞敏)
생년1562(명종 17)
졸년1593(선조 26)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성중(李誠中)
공신호호성공신(扈聖功臣)

[상세내용]

이유징(李幼澄)
1562년(명종 17)∼1593년(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징원(澄源). 호조판서 이성중(李誠中)의 아들이다.

1583년(선조 16)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검열에 서임되었다.

1588년 명나라에 파견된 사신을 수행하여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사축서(司畜署)를 거쳐 병조좌랑지제교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홍문관수찬을 역임하고, 1591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해 이조좌랑, 다시 승문원교리가 되었을 때 순무사에 임명되어 북방의 형편을 살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체찰사 최흥원(崔興源)종사관으로 황해도 지방에 파견되었다. 서울이 위태롭다는 급보를 듣고 달려와 선조서울 근교 사현(沙峴)에서 만나 그뒤 의주까지 호종하여 공신으로 책록되었다.

어머니를 결별하고 선조를 모셨는데 모친은 간도(間道)의주까지 와서 모자상봉하였으니 충효를 겸전하게 된 것이다. 그해 이조정랑으로 중직대부(中直大夫)의 품계를 제수받았다.

왜적을 피하여 북상하던 중 광해군함경도로 가게 되었을 때 수천의 백관과 위졸(衛卒)의 대오를 편성하여 혼란없이 가게 하였다. 선조의주에 머물러 명나라에 원병을 청할 때 이항복(李恒福)막하에서 계책을 세워 평양탈환에 큰 공을 세웠다.

1593년 의주목사병마절제사가 되어 장졸을 통어하는 한편, 장정 3인 이상을 가진 사람에게 2인을 취업하게 하니 민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그러나 과로로 인하여 죽었다.

성품이 강직하여 그를 중상하는 자가 많았으나 선조는 항상 그를 좌우에 있게 하여 대소사를 자문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2등에 책록되었으며,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완흥군(完興君)에 봉하여졌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再造藩邦志

[집필자]

이재호(李載琥)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