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윤담무(尹覃茂)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24B2F4BB34B1555X0
자(字)중번(仲蕃)
호(號)봉탄(鳳灘)
생년1555(명종 10)
졸년1597(선조 30)
시대조선중기
본관파평(坡平)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윤비(尹棐)
조부윤개(尹漑)
증조부윤이손(尹李孫)
외조부이성언(李誠彦)

[상세내용]

윤담무(尹覃茂)
1555년(명종 10)∼1597년(선조 3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중번(仲蕃), 호는 봉탄(鳳灘)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윤이손(尹李孫)의 증손으로, 조부는 좌의정 윤개(尹漑)이고, 부친은 생원 윤비(尹棐)이다. 모친은 한성부좌윤 이성언(李誠彦)의 딸이다.

1579년(선조 13)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88년(선조 22) 『홍문록』에 뽑혔으며, 그 뒤 장령부응교 등을 거쳐 승정원동부승지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승지 유영순(柳永詢)과 처남‧매부 지간이 되어 상피법(相避法: 일정한 친족간에는 동일한 관서나 통속관계에 있는 관서에 함께 근무하는 것을 제한한 제도) 상 체차(遞差: 관직을 교체하거나 대기 발령함)되었다.

이어 병조참지에 제수(除授)되었다가 곧 우부승지동부승지좌부승지를 역임하였고, 1595년(선조 29) 홍문관부제학에 올랐다. 이듬해 대사간으로 발탁되었고, 능력 부족을 이유로 사직하겠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사간으로 재직할 때 승문원제조를 겸하여 전란 중의 외교문서 작성을 담당하였는데, 순무(巡撫) 양호(楊鎬)에게 보낼 회자(回咨: 답신)를 지연시킨 책임이 자신에게도 있으므로 파직시켜줄 것을 왕에게 청하였다. 그러나 헌납(獻納) 최천건(崔天健)이 “순무가 보낸 관리가 그저께 남원으로부터 돌아온 즉시 회자가 늦은 데 대하여 화를 냈는데 그 책임은 순전히 전날에 있었던 것이고, 어제 처음으로 출사한 윤 제조와는 상관이 없습니다.”고 하여 그대로 재직하게 되었다. 그 뒤 호조참의대사간이 되었다가 도승지로 특채되었다. 정유재란 때 선조를 호종하다 해주에서 죽었는데, 선조는 2품의 경우보다 약간 감하여 물품을 보내 치부(致賻)하였다. 사람됨이 성실하고 부탄(浮誕: 마음이 경솔하거나 들떠서 황탄함)하지 않았고, 식견이 있어 중후하고 엄격했으며, 청론(淸論)을 취하여 부박(浮薄: 경솔하거나 마음이 들뜸)한 논의에 동요되지 않았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榜目
萬姓大同譜

[집필자]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