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복(丁胤福)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15C724BCF5B1544X0 |
자(字) | 개석(介錫) |
생년 | 1544(중종 39) |
졸년 | 1592(선조 25)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나주(羅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정응두(丁應斗) |
조부 | 정옥형(丁玉亨) |
외조부 | 송충세(宋忠世) |
[관련정보]
[상세내용]
정윤복(丁胤福)
1544년(중종 39)∼1592년(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개석(介錫).
병조판서 정옥형(丁玉亨)의 손자로 좌찬성 정응두(丁應斗)의 아들이며, 모친은 군수 송충세(宋忠世)의 딸이다.
1567년(명종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고, 이어 예조좌랑‧수찬‧집의‧우승지‧대사성‧부제학‧도승지‧병조판서‧동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난이 일어나자 정여립과 친하였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다시 행호군으로 보직되었으나, 계속 말썽이 일어나므로 물러나 수년 동안 한거하였다.
임진왜란 때 동서로호소사(東西路號召使)로 기용되고, 이어 우통어사(右統禦使)가 되었다.
선조가 북쪽으로 피란할 때 다리가 불편하여 따라가지 못하고, 분조(分朝)인 이천(伊川)으로 가서 병조참판을 제수받고 가산군에 이르렀을 때 병이 심해져 죽었다.
병조판서 정옥형(丁玉亨)의 손자로 좌찬성 정응두(丁應斗)의 아들이며, 모친은 군수 송충세(宋忠世)의 딸이다.
1567년(명종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고, 이어 예조좌랑‧수찬‧집의‧우승지‧대사성‧부제학‧도승지‧병조판서‧동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난이 일어나자 정여립과 친하였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다시 행호군으로 보직되었으나, 계속 말썽이 일어나므로 물러나 수년 동안 한거하였다.
임진왜란 때 동서로호소사(東西路號召使)로 기용되고, 이어 우통어사(右統禦使)가 되었다.
선조가 북쪽으로 피란할 때 다리가 불편하여 따라가지 못하고, 분조(分朝)인 이천(伊川)으로 가서 병조참판을 제수받고 가산군에 이르렀을 때 병이 심해져 죽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집필자]
김동수(金東洙)
명 : "윤복(胤福)"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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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