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신(徐希信)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11CD76CC2E0B1542X0 |
자(字) | 경립(景立) |
호(號) | 송와(松窩) |
생년 | 1542(중종 37)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이천(利川)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서홍필(徐弘弼) |
증조부 | 서숙명(徐叔明) |
[관련정보]
[상세내용]
서희신(徐希信)
1542년(중종 37)∼미상. 본관은 이천(利川) 혹은 남평(南平). 자는 경립(景立), 호는 송와(松窩).
판윤(判尹) 서숙명(徐叔明)의 증손이며, 서홍필(徐弘弼)의 아들로 태어났다. 1567년(선조 즉위)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19위로 합격하고, 41세 때인 1582년(선조 15)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6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은 박사(博士)를 거쳐 단양군수(丹陽郡守)에 이르렀다. 1594년 흉년이 들자 은계찰방(銀溪察訪)이었던 서희신(徐希信)은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데는 상수리 열매가 요긴하다는 내용의 글을 비변사에 보내었는데, 임금이 도토리 구제법을 착실히 실행하도록 하라는 비답을 내렸다. 광해군의 암울한 시기를 당해 공명(功名)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신명사기(神明舍記)」를 짓고는 물러나서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후에 북평사(北評事)로 불러들였으나 가는 도중에 죽었다. 『응천일록(凝川日錄)』의「계축년(광해군 5, 1613)」 8월 14일조에는 ‘서희신이 상소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상소를 살피건대, 너의 품은 뜻을 아뢰려는 정성을 아름답게 여긴다. 다만 생각하니 국가가 불행하여 비록 당을 나누는 명목은 있을지언정 타고난 양심은 고루 가졌으리니, 어찌 같은 편의 사람이 다 역적이 될 리가 있으랴. 우두머리를 무찌른 뒤에는 내가 똑같이 보고 똑같이 사랑하여 저쪽이나 이쪽이나 차별 없이 하겠으니,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판윤(判尹) 서숙명(徐叔明)의 증손이며, 서홍필(徐弘弼)의 아들로 태어났다. 1567년(선조 즉위)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19위로 합격하고, 41세 때인 1582년(선조 15)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6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은 박사(博士)를 거쳐 단양군수(丹陽郡守)에 이르렀다. 1594년 흉년이 들자 은계찰방(銀溪察訪)이었던 서희신(徐希信)은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데는 상수리 열매가 요긴하다는 내용의 글을 비변사에 보내었는데, 임금이 도토리 구제법을 착실히 실행하도록 하라는 비답을 내렸다. 광해군의 암울한 시기를 당해 공명(功名)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신명사기(神明舍記)」를 짓고는 물러나서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후에 북평사(北評事)로 불러들였으나 가는 도중에 죽었다. 『응천일록(凝川日錄)』의「계축년(광해군 5, 1613)」 8월 14일조에는 ‘서희신이 상소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상소를 살피건대, 너의 품은 뜻을 아뢰려는 정성을 아름답게 여긴다. 다만 생각하니 국가가 불행하여 비록 당을 나누는 명목은 있을지언정 타고난 양심은 고루 가졌으리니, 어찌 같은 편의 사람이 다 역적이 될 리가 있으랴. 우두머리를 무찌른 뒤에는 내가 똑같이 보고 똑같이 사랑하여 저쪽이나 이쪽이나 차별 없이 하겠으니,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참고문헌]
國朝文科榜目
CD-ROM 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
凝川日錄
朝鮮人名辭書
CD-ROM 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
凝川日錄
朝鮮人名辭書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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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31 | 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