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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언신(宋言愼)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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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과우(寡尤)
호(號)호봉(壺峰)
시호(諡號)영양(榮襄)
생년1542(중종 37)
졸년1612(광해군 4)
시대조선중기
본관여산(礪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송율(宋嵂)
저서『성학지남(聖學指南)』

[상세내용]

송언신(宋言愼)
1542년(중종 37)∼1612년(광해군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과우(寡尤). 호는 호봉(壺峰).

부사 송율(宋嵂)의 아들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유희춘(柳希春)노수신(盧守愼)의 문하에도 출입한 바 있다.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정언 등을 지냈다. 젊어서는 언관으로 서인을 공격하는 데에 앞장섰다.

1589년 기축옥사 때 정여립(鄭汝立)과 연루되어 부교리에서 면직되었다.

그뒤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나 1592년에 삭직되었고, 1596년 동면순검사(東面巡檢使)로 다시 등용된 뒤 대사간병조판서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일찍이 불교를 배척하여 승 보우(普雨)를 죽일 것을 건의하였으며, 또 동면순검사로 재직할 때에는 인력이 부족한 겨울철에 수성책으로서 성벽에 물을 부어 얼리는 계책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함경도관찰사가 되어서는 오랑캐의 동정에 각별한 유의를 하고 휘하 수령들을적절히 장악한 듯하나 여러 번 간관들의 탄핵을 받았다.

실록의 사평(史評)에는 위인이 흉활(兇猾)하고 탐비(貪鄙)하며 음패(淫悖)스러운 행실이 많아 사인(士人)으로서 교양 있는 사람은 더불어 교제하는 것을 수치로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선조의 특별한 신임을 얻어 이조판서까지 역임하였다.

여색을 가까이 하였다고 하며 경상(卿相)으로서 『속어면순(續禦眠楯)』과 같은 야담집에까지 이름이 올랐다.

임진왜란과 그뒤의 어려운 시기에 양사의 장을 역임하면서 당쟁의 선봉이 되었다가 광해군 초년에 축출되었다.

저서로 『성학지남(聖學指南)』이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淸選考

[집필자]

김용덕(金龍德)

명 : "언신(言愼)"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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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鑑補遺v3陳說而望回天聽乎時憲府已停啓故珥亦停啓而貽書于言愼曰君論尹之章有稱美之辭士論頗非笑之臺諫體皃必湏自處言愼怒之乃詣闕避嫌而其言多悖亂不倫專欲營救毅中而抑沮兩司至陰斥以構成不根排擯異已做出人不德等語聞者驚愕諫
宣鑑補遺v3排擯異已做出人不德等語聞者驚愕諫院啓遆言愼而憲府亦請罷上不允是時流俗位高者自附東人多指珥爲陰助西人故言愼欲附東人乃作此擧得罪於士類矣命賜成渾米菽時渾寓都下艱食上問于政院曰成渾受祿否對曰未肅拜故不敢受祿耳上
國朝人物志v2字寡尤號壺峯礪山人父嵂武科府使娶禮曹判書居昌愼希復女生言愼踰弱冠慨然闢佛請誅妖僧普雨篤爲己之學眉菴柳希春草堂許曄蘇齋盧守愼之門無不追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