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응복(朴應福)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C15C751BCF5B1530X0 |
자(字) | 경중(慶仲) |
호(號) | 졸헌(拙軒) |
생년 | 1530(중종 25) |
졸년 | 1598(선조 31)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반남(潘南)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박소(朴紹) |
모 | 남양홍씨(南陽洪氏) |
외조부 | 홍사부(洪士俯) |
묘소 | 양주 금촌(金村) |
[관련정보]
[상세내용]
박응복(朴應福)
1530년(중종 25)∼1598년(선조 3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경중(慶仲), 호는 졸헌(拙軒). 사간(司諫) 박소(朴紹)의 아들이며, 모친은 남양홍씨(南陽洪氏)로 홍사부(洪士俯)의 딸이다.
5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7세부터 유조순(柳祖詢)‧성제원(成悌元)‧이중호(李仲虎) 등에게서 배웠다.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 1564년에 식년문과 을과에 급제하였다. 승문원저작‧춘추관 봉교‧전적‧감찰‧예조좌랑‧병조좌랑‧정언‧지평‧헌납‧장령‧사간‧집의‧성균관사예‧성균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동서분당이 되어 당쟁이 일기 시작하자 한때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힐 생각도 하였으나, 1577년(선조 10) 다시 관계에 나와 집의‧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공조참의‧호조참의를 거치고, 병조참의로 있을 때 당시 병조판서 이이(李珥)를 배척하는 상소가 받아들여지고 지지하는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보고 사직하였다.
1589년 병조참판에 제수되어 대사헌,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同知義禁)을 거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참판 겸 부총관으로서 왕을 호종하였고,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에서 대사간‧공조참판을 지냈다.
1593년 왕을 호종하고 환도하던 중 해주에 이르러 병으로 인하여 뒤에 떨어졌다가, 1595년 왕비를 호종하여 환도한 뒤 형조참판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왕비를 호종하고 수안(遂安)까지 가서 이듬해 그곳에서 병으로 죽었다. 묘지는 양주 금촌(金村)에 있다.
5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7세부터 유조순(柳祖詢)‧성제원(成悌元)‧이중호(李仲虎) 등에게서 배웠다.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 1564년에 식년문과 을과에 급제하였다. 승문원저작‧춘추관 봉교‧전적‧감찰‧예조좌랑‧병조좌랑‧정언‧지평‧헌납‧장령‧사간‧집의‧성균관사예‧성균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동서분당이 되어 당쟁이 일기 시작하자 한때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힐 생각도 하였으나, 1577년(선조 10) 다시 관계에 나와 집의‧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공조참의‧호조참의를 거치고, 병조참의로 있을 때 당시 병조판서 이이(李珥)를 배척하는 상소가 받아들여지고 지지하는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보고 사직하였다.
1589년 병조참판에 제수되어 대사헌,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同知義禁)을 거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참판 겸 부총관으로서 왕을 호종하였고,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에서 대사간‧공조참판을 지냈다.
1593년 왕을 호종하고 환도하던 중 해주에 이르러 병으로 인하여 뒤에 떨어졌다가, 1595년 왕비를 호종하여 환도한 뒤 형조참판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왕비를 호종하고 수안(遂安)까지 가서 이듬해 그곳에서 병으로 죽었다. 묘지는 양주 금촌(金村)에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朝鮮湖南誌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朝鮮湖南誌
[집필자]
박정자(朴定子)
대표명 | 박응복(朴應福) |
명 | 응복(應福) |
봉호 | 반천부원군(潘川府院君) |
성명 | 박응복(朴應福) |
자 | 경중(慶仲) |
호 | 졸헌(拙軒) |
명 : "응복(應福)"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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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