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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윤창(韓胤昌)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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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창지(昌之)
생년1480(성종 11)
졸년?(미상)
시대조선전기
본관청주(淸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한사개(韓士介)
조부한계희(韓繼禧)
증조부한혜(韓惠)
외조부이유인(李有仁)

[상세내용]

한윤창(韓胤昌)
1480년(성종 11)∼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창지(昌之). 함길도관찰출척사 한혜(韓惠)의 증손으로, 조부는 좌찬성 한계희(韓繼禧)이고, 부친은 한사개(韓士介)이며, 모친은 이유인(李有仁)의 딸이다.

진사로서 1509년(중종 4)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정언지평헌납장령사간 등을 역임하였는데, 흥원군(興原君)의 집에 도둑이 들어 잃어버린 소가죽을 그의 집에서 발견하였다고 하여 관직이 갈렸다.

1521년(중종 16)에 도감낭관(都監郎官)으로서 황제의 상(喪) 중에 자최복(齊衰服: 오복의 하나로서 약간 굵은 삼베로 지은 상복)을 입고서 고기를 먹음으로써 명나라 사신에게 욕을 당하고 사절(士節)을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추고, 체직되었다.

1526년(중종 21)에는 사옹원정으로서 강원도에 가 봉례(奉禮)하였으며, 이후에 사간을 거쳐 응교로서 경연에 참여하였고, 좌우승지를 거쳐 1534년(중종 29) 6월 전라도관찰사로 내려갔다. 이듬해에 다시 경직을 맡아 대사성, 한성부우윤을 거쳐 다시 외직인 개성부유수, 경상도충청도관찰사를 지냈다.

1538년(중종 33) 경상도관찰사에 제수(除授)되었을 때에 사헌부에서는 재주와 국량이 졸렬하여 그 직을 감당하지 못할 자이므로 체직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전라도관찰사 재직 때 법의 봉행이 엄정하였으며, 개성부유수 등의 직임도 무난하게 수행하였으므로 체직시킬 수 없다고 하였다.

이어서 충청도관찰사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예조공조형조 참판을 거쳐 한성부 판윤우윤좌윤을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임민혁
대표명한윤창(韓胤昌)
성명한윤창(韓胤昌)

성명 : "한윤창(韓胤昌)"에 대한 용례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