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한(崔輔漢)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D5CBCF4D55CD1546X0 |
자(字) | 언경(彦卿) |
생년 | ?(미상) |
졸년 | 1546(명종 1)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수원(水原)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최윤명(崔潤明) |
외조부 | 이의석(李宜碩) |
공신호 | 위사공신(衛社功臣) |
[관련정보]
[상세내용]
최보한(崔輔漢)
미상∼1546년(명종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언경(彦卿).
부친은 최윤명(崔潤明)이며, 모친은 이의석(李宜碩)의 딸이다.
1524년(중종 19) 생원으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선전관이 되었고, 1527년 이문전시(吏文殿試)에 급제한 뒤 문반으로 직을 옮겼다.
1533년 사간원정언이 되었는데 이때에 당하관의 각촉부시(刻燭賦試)에서 차석을 하여 왕으로부터 조궁(造弓)을 받았다.
1537년 지평‧사간원헌납을 역임하면서 당시의 권간 김안로(金安老)를 제거하고 그 일당을 축출하는 데 앞장섰다. 이어 응교‧전한‧사인(舍人) 등을 거쳐 1539년 부제학을 지내고, 이듬해 대사헌‧대사간 등 삼사의 장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뒤 한성부우윤‧형조참판을 거쳐 1541년 다시 대사헌이 되었고, 이듬해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43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1545년(인종 1) 인종이 죽었을 때 수릉관(守陵官)에 임명되자 대신에게 찾아가 수척한 몸으로 3년상을 견디어낼 수 없다고 정강이뼈까지 내보이며 사정하여 교체되었는데, 이 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백인걸(白仁傑)의 변호로 무사하였다.
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이기(李芑)의 족질로서 대윤(大尹) 일당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그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수산군(隨山君)에 봉하여졌으며 가선대부에 올랐다.
그뒤 이조판서가 되어서는 친족들을 대거 등용하고 뇌물을 좋아하여 청탁이 공공연히 행하여졌으나 당시 이기가 두려워서 어느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
부친은 최윤명(崔潤明)이며, 모친은 이의석(李宜碩)의 딸이다.
1524년(중종 19) 생원으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선전관이 되었고, 1527년 이문전시(吏文殿試)에 급제한 뒤 문반으로 직을 옮겼다.
1533년 사간원정언이 되었는데 이때에 당하관의 각촉부시(刻燭賦試)에서 차석을 하여 왕으로부터 조궁(造弓)을 받았다.
1537년 지평‧사간원헌납을 역임하면서 당시의 권간 김안로(金安老)를 제거하고 그 일당을 축출하는 데 앞장섰다. 이어 응교‧전한‧사인(舍人) 등을 거쳐 1539년 부제학을 지내고, 이듬해 대사헌‧대사간 등 삼사의 장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뒤 한성부우윤‧형조참판을 거쳐 1541년 다시 대사헌이 되었고, 이듬해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43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1545년(인종 1) 인종이 죽었을 때 수릉관(守陵官)에 임명되자 대신에게 찾아가 수척한 몸으로 3년상을 견디어낼 수 없다고 정강이뼈까지 내보이며 사정하여 교체되었는데, 이 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백인걸(白仁傑)의 변호로 무사하였다.
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이기(李芑)의 족질로서 대윤(大尹) 일당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그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수산군(隨山君)에 봉하여졌으며 가선대부에 올랐다.
그뒤 이조판서가 되어서는 친족들을 대거 등용하고 뇌물을 좋아하여 청탁이 공공연히 행하여졌으나 당시 이기가 두려워서 어느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仁宗實錄
明宗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仁宗實錄
明宗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집필자]
차문섭(車文燮)
자 : "언경(彦卿)"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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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