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수(金益壽)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C775C218B1491X0 |
자(字) | 인경(仁卿) |
생년 | 1491(성종 22)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김해(金海)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익수(金益壽)
1491년(성종 22)~졸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인경(仁卿). 본관은 김해(金海).
1521년(중종 16) 세자시강원설서에 이어 지평을 거쳐, 1529년 경기도재상어사(京畿道灾傷御史)로 파견되었다.
1536년 충청도 암행어사로 다녀와 장령‧동부승지가 되었다. 이해 부인의 투기로 첩을 독살한 사건이 있어 체직(遞職)되었으나, 이듬해 예조참의가 되었다.
1543년 진하사로 북경에 다녀와 충청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주목사로 있을 때 직사(職事)에 힘쓰지 않았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이듬해 예조참의가 되고, 명종이 즉위하자 충청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장례원판결사를 거쳐 1546년(명종 1) 우승지‧경연참찬관‧도승지로 지방의 자제를 훈도할 방법을 진언하여 「외방학교신명절목(外方學校申明節目)」이 마련되자 이를 전국에 권장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형조참판이 되고, 이듬해 다시 충청감사가 되어 여러 읍의 수재(水災)를 해결하는 데 노력하였다.
1548년 병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관상감제조가 되었다.
1549년 온성(穩城)에서 야인들이 노략질하는 일이 발생하자, 함경도 비변대책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521년(중종 16) 세자시강원설서에 이어 지평을 거쳐, 1529년 경기도재상어사(京畿道灾傷御史)로 파견되었다.
1536년 충청도 암행어사로 다녀와 장령‧동부승지가 되었다. 이해 부인의 투기로 첩을 독살한 사건이 있어 체직(遞職)되었으나, 이듬해 예조참의가 되었다.
1543년 진하사로 북경에 다녀와 충청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주목사로 있을 때 직사(職事)에 힘쓰지 않았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이듬해 예조참의가 되고, 명종이 즉위하자 충청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장례원판결사를 거쳐 1546년(명종 1) 우승지‧경연참찬관‧도승지로 지방의 자제를 훈도할 방법을 진언하여 「외방학교신명절목(外方學校申明節目)」이 마련되자 이를 전국에 권장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형조참판이 되고, 이듬해 다시 충청감사가 되어 여러 읍의 수재(水災)를 해결하는 데 노력하였다.
1548년 병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관상감제조가 되었다.
1549년 온성(穩城)에서 야인들이 노략질하는 일이 발생하자, 함경도 비변대책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仁宗實錄
明宗實錄
仁宗實錄
明宗實錄
[집필자]
이봉래(李鳳來)
대표명 | 김익수(金益壽) |
성명 | 김익수(金益壽) |
성명 : "김익수(金益壽)"에 대한 용례
전거 | 용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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錦營公案 | 觀察使 金益壽 丁未 官至參判 |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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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