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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원(金孝元)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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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인백(仁伯)
호(號)성암(省菴)
생년1542(중종 37)
졸년1590(선조 23)
시대조선전기
본관선산(善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홍우(金弘遇)
조부김덕유(金德裕)
증조부김수현(金秀賢)
저서『성암집』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효원(金孝元)
1542년(중종 37)∼1590년(선조 23). 조선 선조 때의 문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백(仁伯), 호는 성암(省菴).

증조부는 김수현(金秀賢)이고, 조부는 김덕유(金德裕)이며, 부는 현감 김홍우(金弘遇)이다.

조식(曺植)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64년(명종 19) 진사가 되고, 1565년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정언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573년(선조 6)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1574년 다시 지평을 맡았다. 명종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죽은 뒤에 척신계(戚臣系)의 몰락과 더불어 새로이 등용되기 시작한 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1572년 오건(吳健)이조전랑(吏曹銓郞)에 추천하였으나, 사림으로 척신 윤원형(尹元衡)의 문객이었다는 이유로 이조참의 심의겸(沈義謙)이 반대하여 거부당하였다.

그러나 1574년 조정기(趙廷機)의 추천으로 결국 이조전랑이 되었다.

1575년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沈忠謙)이조전랑으로 추천되자, 전랑의 관직은 척신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고 이발(李潑)을 추천하였다. 이러한 일을 계기로 심의겸과의 반목이 심해지면서, 사림계는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즉, 훈신(勳臣)‧척신들에 의한 정치체제의 개혁을 둘러싸고 선조 즉위 직후부터 전배(前輩)와 후배(後輩)의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척신정권 때 정계에 진출하여 심의겸의 도움을 받은 사림이 전배이고, 소윤의 몰락 이후 심의겸과 무관하게 정계에 진출한 부류가 후배로, 이들 후배 사림은 심의겸의 척신적 처지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대립은 이조전랑 추천과 임명을 둘러싼 대립을 계기로 점차 심화되어,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전배는 대부분 서인이 되고,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후배는 동인이 되었다. 김효원의 집이 동부의 건천동(乾川洞)에 있다고 해서, 그 일파를 동인이라 불렀다.

두 사람의 대립이 점차 심해지자, 우의정 노수신(盧守愼), 부제학 이이(李珥) 등이 분규의 완화를 조정하고자 두 사람 모두 외직으로 내보낼 것을 건의하여, 심의겸개성부유수로, 김효원경흥부사로 나갔다.

그러나 김효원을 지지하는 후배들이 그를 축출한 것이라 반발하여 다시 부령부사로 옮기게 하였으나, 이 역시 부령이 변방이라 하여 반발하므로 다시 삼척부사로 옮기게 되었다.

결국 노수신이이의 조정은 실패하였고, 선조는 당쟁의 완화를 위한 조처로 이조전랑의 추천‧교대제도를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뒤에 사간의 물망에 올랐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아 내직에 복귀하지 못하였고, 당쟁이 더욱 심해지면서 안악군수로 자청해 나갔다.

그뒤 10여년간 한직(閑職)에 머물며 당쟁이 일어난 것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고 시사(時事)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나중에 선조의 특명으로 영흥부사로 승진하여 재직중에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삼척경행서원(景行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는 『성암집』이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省菴遺稿
東溟集
南冥集
東儒師友錄
黨議通略
李朝黨爭史硏究(姜周鎭, 서울대학교出版部, 1971)

[집필자]

이태진(李泰鎭)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1-09-15사마방목, 국조인물지, 국립중앙도서관본 문과방목을 참고하여 생년을 임진(1532)에서 임인(1542)으로 수정함. 규장각본(문과방목 2종)에는 생년이 임진(壬辰)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국조인물지에는 문과 급제 연령이 24세[年二十四]로 적혀있고, 사마방목의 기록과 동생인 김신원(金信元), 김의원(金義元)의 생년이 각각 1553년, 1558년을 감안하면 1542년 임인생이 확실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