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필무(張弼武)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A5D544BB34B1510X0 |
자(字) | 무부(武夫) |
호(號) | 백야(栢冶) |
시호(諡號) | 양정(襄貞) |
생년 | 1510(중종 5) |
졸년 | 1574(선조 7)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구례(求禮) |
활동분야 | 무신 > 무신 |
부 | 장근(張謹) |
조부 | 장사종(張嗣宗) |
저서 | 『백야유사』 |
[상세내용]
장필무(張弼武)
1510년(중종 5)∼1574년(선조 7).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구례(求禮). 자는 무부(武夫), 호는 백야(栢冶).
군수 장사종(張嗣宗)의 손자로, 장근(張謹)의 아들이다.
1543년(중종 38) 무과에 급제하고, 그뒤 부산진첨절제사‧제주목사‧만포진첨절제사를 지냈다. 종사관(從事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온성판관으로 변방의 경계를 엄중히 하였다.
1572년(선조 5) 함경도병마절도사로서 오랑캐의 침입을 막았고, 1573년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무인이면서도 역학(易學)에 밝았고, 명종‧선조대의 무인으로서는 가장 청렴결백하기로 이름이 났으며, 죽은 뒤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영동의 화암서원(花巖書院), 무주의 죽계서원(竹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백야유사』가 있다. 시호는 양정(襄貞)이다.
군수 장사종(張嗣宗)의 손자로, 장근(張謹)의 아들이다.
1543년(중종 38) 무과에 급제하고, 그뒤 부산진첨절제사‧제주목사‧만포진첨절제사를 지냈다. 종사관(從事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온성판관으로 변방의 경계를 엄중히 하였다.
1572년(선조 5) 함경도병마절도사로서 오랑캐의 침입을 막았고, 1573년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무인이면서도 역학(易學)에 밝았고, 명종‧선조대의 무인으로서는 가장 청렴결백하기로 이름이 났으며, 죽은 뒤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영동의 화암서원(花巖書院), 무주의 죽계서원(竹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백야유사』가 있다. 시호는 양정(襄貞)이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宣祖修正實錄
國朝人物考
海東名臣錄
宣祖實錄
宣祖修正實錄
國朝人物考
海東名臣錄
[집필자]
이재범(李在範)
명 : "필무(弼武)"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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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