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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소(孫昭)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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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일장(日章)
호(號)송재(松齋)
시호(諡號)양민(襄敏)
생년1433(세종 15)
졸년1484(성종 15)
시대조선전기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손사성(孫士晟)
공신호적개공신(敵愾功臣)

[상세내용]

손소(孫昭)
1433년(세종 15)∼1484년(성종 15).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일장(日章), 호는 송재(松齋).

부친은 증병조참판 손사성(孫士晟)이다.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보직되고,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로 있을 때 문예시(文藝試)에 장원하여 한 자급(資級) 특진되었다.

1464년 정월 『의방유취(醫方類聚)』의 교정을 잘못 보아 파직되었다.

그러나 그해 7월 집현전을 폐지하고 예문관이 대신하도록 했을 때 겸예문관이 되었다가 11월에 병조좌랑을 거쳐 종묘서령(宗廟署令)이 되었다.

1467년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는 평노장군(平虜將軍) 박중손(朴仲孫)종사관(從事官)으로서 군무(軍務)를 관장, 평정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책훈되고 내섬시정(內贍寺正)으로 특진되었다.

1469년(예종 1) 성주목사를 거쳐 공조참의안동부사를 역임하고 계천군(雞川君)에 봉해졌다.

1476년(성종 7) 11월 진주목사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여 전리(田里)로 돌아갔으나 왕이 특명으로 녹봉(祿俸)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그는 청렴결백하고 백성을 다스리되 친자식같이 하였다.

일찍이 성주목사로 있을 때 기근이 극심하게 들었으나 극진한 마음으로 구휼하여 희생자가 없어서, 그곳 이민(里民)의 호소로 임기가 연장되기도 하여 목민관의 모범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여 성주진주안동 등의 외관직은 경주에 있는 그의 노부를 봉양하기 위하여 스스로 원하여 왕의 특지(特旨)로 임명된 벼슬이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시호는 양민(襄敏)이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國朝人物考
槿域書畵徵
佔畢齋集

[집필자]

차문섭(車文燮)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