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응(鄭譍)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815C751FFFFB1490X0 |
자(字) | 응지(譍之) |
호(號) | 소우당(素愚堂) |
생년 | 1490(성종 21) |
졸년 | 1522(중종 17)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동래(東萊)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정인후(鄭仁厚) |

[관련정보]
[상세내용]
정응(鄭譍)
1490년(성종 21)∼1522년(중종 1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응지(譍之), 호는 소우당(素愚堂). 돈녕부정 정인후(鄭仁厚)의 아들이다.
1507년(중종 2)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1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홍문관정자에 초수(初授)되었으며, 1516년 김정(金淨)‧신광한(申光漢)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전경‧저작‧박사를 역임하였고, 이어 경연사경(經筵司經)에 재임중 내수사(內需司) 장리(長利)의 혁파 등 구제(舊制)의 혁파를 주장하였다.
이어 홍문관수찬에 승보(陞補)되었고, 사간원정언으로 대사헌 이행(李荇)을 탄핵하여 면직하게 하였으며, 그뒤 예조‧병조의 좌랑을 거쳐 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다.
1518년 지평으로 전보되었는데, 이때 훈구파로부터 조광조(趙光祖)를 영수로 하는 사림파 집단으로 지목되어 모함을 받기도 하였으며, 같은해 성리학의 이론서인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진강(進講)할 수 있는 인물로 추천되었다.
그뒤 헌납을 거쳐 1519년 이조정랑을 역임한 뒤 홍문관응교를 거쳐, 전한 겸 예문관응교로 발탁되었다.
그해 겨울 훈구파인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에 의하여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의 무죄를 주청하였으며, 결국 이에 연루되어 부여로 유배당하였고, 1522년 적소에서 33세로 죽었다. 1538년(중종 33)에 직첩(職牒)을 되돌려 받았다(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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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파의 영수인 조광조로부터 크게 쓰일 인물로 촉망을 받았으며, 기묘사화 이전의 개혁정치 시기에 사림파로서 전통적 명분의 회복, 새로운 통치질서의 수립 등에 기여한 바가 많았다.
1507년(중종 2)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1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홍문관정자에 초수(初授)되었으며, 1516년 김정(金淨)‧신광한(申光漢)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전경‧저작‧박사를 역임하였고, 이어 경연사경(經筵司經)에 재임중 내수사(內需司) 장리(長利)의 혁파 등 구제(舊制)의 혁파를 주장하였다.
이어 홍문관수찬에 승보(陞補)되었고, 사간원정언으로 대사헌 이행(李荇)을 탄핵하여 면직하게 하였으며, 그뒤 예조‧병조의 좌랑을 거쳐 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다.
1518년 지평으로 전보되었는데, 이때 훈구파로부터 조광조(趙光祖)를 영수로 하는 사림파 집단으로 지목되어 모함을 받기도 하였으며, 같은해 성리학의 이론서인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진강(進講)할 수 있는 인물로 추천되었다.
그뒤 헌납을 거쳐 1519년 이조정랑을 역임한 뒤 홍문관응교를 거쳐, 전한 겸 예문관응교로 발탁되었다.
그해 겨울 훈구파인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에 의하여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의 무죄를 주청하였으며, 결국 이에 연루되어 부여로 유배당하였고, 1522년 적소에서 33세로 죽었다. 1538년(중종 33)에 직첩(職牒)을 되돌려 받았다(주1)
직첩 반환 |
중종실록 87권, 1538년 4월 12일자 기사 “전교하였다....(중략)...전한(典翰) 정응(鄭譍)...등은 모두 직첩을 되돌려주라.”를 참고하여 내용을 추가함. |
사림파의 영수인 조광조로부터 크게 쓰일 인물로 촉망을 받았으며, 기묘사화 이전의 개혁정치 시기에 사림파로서 전통적 명분의 회복, 새로운 통치질서의 수립 등에 기여한 바가 많았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집필자]
이병휴(李秉烋)
성명 : "정응(鄭譍)"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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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2012-06-05 | 조선왕조실록을 참고하여 "1538년(중종 33)에 직첩(職牒)을 되돌려 받았다"는 내용을 추가함.[수정자: 이재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