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여헌(黃汝獻)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D669C5ECD5CCB1486X0 |
자(字) | 헌지(獻之) |
호(號) | 유촌(柳村) |
생년 | 1486(성종 17)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장수(長水)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황관(黃灌) |
5대조 | 황희(黃喜) |
저서 | 『유촌집』 |
[관련정보]
[상세내용]
황여헌(黃汝獻)
1486년(성종 17)∼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헌지(獻之), 호는 유촌(柳村).
영의정 황희(黃喜)의 현손으로, 부사 황관(黃灌)의 아들이며, 황맹헌(黃孟獻)의 아우이다.
1509년(중종 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저작‧박사를 거쳐, 1511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이조좌랑을 역임하고 1515년 전적이 되었다. 이어 이조참의와 울산군수를 지냈으나, 1533년 사건으로 금산(金山)옥에서 도망하였다가 다시 체포되어 장류(杖流)의 형을 받았다.
그러나 혐의가 있는 전 도사 정공청(鄭公淸)의 죄를 폭로하는 투서를 사헌부에 낸 뒤 양사(兩司)의 주청에 의하여 감형, 석방되었다.
문장과 글씨로 소세양(蘇世讓)‧정사룡(鄭士龍)과 함께 당대에 이름이 있었고, 「죽지사(竹枝詞)」라는 작품은 명나라에서도 격찬을 받았다 한다.
저서로 『유촌집』이 있다.
영의정 황희(黃喜)의 현손으로, 부사 황관(黃灌)의 아들이며, 황맹헌(黃孟獻)의 아우이다.
1509년(중종 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저작‧박사를 거쳐, 1511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이조좌랑을 역임하고 1515년 전적이 되었다. 이어 이조참의와 울산군수를 지냈으나, 1533년 사건으로 금산(金山)옥에서 도망하였다가 다시 체포되어 장류(杖流)의 형을 받았다.
그러나 혐의가 있는 전 도사 정공청(鄭公淸)의 죄를 폭로하는 투서를 사헌부에 낸 뒤 양사(兩司)의 주청에 의하여 감형, 석방되었다.
문장과 글씨로 소세양(蘇世讓)‧정사룡(鄭士龍)과 함께 당대에 이름이 있었고, 「죽지사(竹枝詞)」라는 작품은 명나라에서도 격찬을 받았다 한다.
저서로 『유촌집』이 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國朝榜目
尙州邑誌
國朝榜目
尙州邑誌
[집필자]
윤용혁(尹龍爀)
명 : "여헌(汝獻)"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