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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당(安瑭)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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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언보(彦寶)
호(號)영모당(永慕堂)
시호(諡號)정민(貞愍)
생년1461(세조 7)
졸년1521(중종 16)
시대조선전기
본관순흥(順興)
활동분야문신 > 문신
안돈후(安敦厚)
출신지서울
공신호정난공신(定難功臣)
공신호정국공신(靖國功臣)

[상세내용]

안당(安瑭)
1461년(세조 7)∼1521년(중종 16).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언보(彦寶), 호는 영모당(永慕堂). 서울 출신.

부친은 사예안돈후(安敦厚)이다. 안처겸(安處謙)안처함(安處諴)안처근(安處謹) 형제의 아버지이다.

1481년(성종 12)에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사성을 거쳐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496년(연산군 2)에 사헌부장령, 1506년(중종 1)에 연산군이 폐지하였던 사간원이 부활되면서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1507년 정난공신(定難功臣) 3등에 책록되고 우부승지를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508년 12월에 순흥군(順興君)으로 봉작되었다. 이듬해에 대사헌을 거쳐 형조병조참판,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514년 11월에 호조판서, 1515년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때 구폐를 혁신하고 분경(奔競)을 금지시켰으며, 관리의 등용에 있어 순자법(循資法)에 따르지 말고 어진 인재를 발탁해서 쓸 것을 주장하여, 김안국(金安國)김정국(金正國)김식(金湜)조광조(趙光祖)박훈(朴薰)김대유(金大有)반석평(藩碩枰)송흠(宋欽) 등을 탁용하거나 천거하였다.

같은해 8월 박상(朴詳)김정(金淨) 등이 중종의 폐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청하다가 대간으로부터 탄핵을 받자 구언(求言)을 하여놓고, 죄를 주는 것은 언로를 막는 것이라고 하여 이들을 극구 변호하였다. 이 일로 그 자신도 대간으로부터 탄핵을 받았지만, 사림으로부터는 높이 추앙받게 되었다.

1516년에 직을 바꾸어줄 것을 청하여 윤허받았으나 다시 다음해에 호조판서로 기용되고, 1518년에 우찬성이 되었다가 그해 5월 우의정으로 승진하였다. 이 우의정 임명은 김전(金詮)과 경합이 되었으나 사림계열의 지지로 그가 제수받게 되었다.

이때 소격서의 혁파 등을 계청(啓請)하였고, 1519년 정국공신(靖國功臣)의 삭훈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처음에는 찬성하지 않았으나, 나중에 극구찬성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영의정 정광필(鄭光弼)과 함께 조광조 등을 변호하여 구원하고자 하다가 대간으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같은해 11월 좌의정이 되었으나 대간으로부터 계속 탄핵받았으며, 더욱 현량과(賢良科) 설치를 처음 주장한 사람으로서, 세 아들을 모두 천거되게 하였다는 허물까지 쓰고 기묘당인의 우익으로 배척당하였다.

이해 12월에 파직당하였다가 곧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나, 다시 대간으로부터 고신(告身)을 환수시킬 것을 요청하는 등의 탄핵을 받았다.

1521년 아들 안처경이 처가에서 종실 시산부정(詩山副正) 정숙(正叔), 권전(權磌) 등과 국왕의 측근에 있는 간신을 제거하여 국세를 비로잡아야 한다고 말을 나눈 것이 송사련(宋祀連)에 의하여 고변당하여,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의 여러 대신을 살해하려 하였다는 혐의로 처형됨에, 그도 고하지 않은 죄목으로 연좌되어 교사형(絞死刑)에 처해졌다. 이 사건은 심정 등이 집의 윤지형(尹止衡) 등을 사주하여 일으킨 것이라 하며 신사무옥이라 이른다. 명종 때 손자인 안윤(安玧)의 상소에 의하여 누명이 벗겨지고 복관되었다.

행동이 신중하고 말이 적으며, 청렴공정한 성품으로 옳은 일에 용감하였다는 평을 받았으며, 특히 사림을 정계에 등용시키고 그들을 옹호함으로써 사림에게 중망이 컸다.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燃藜室記述
海東名臣錄
國朝榜目
思齋集
己卯錄補遺
黃兎記事
楓巖輯話
海東雜錄

[집필자]

김동수(金東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