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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朴薰)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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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형지(馨之)
호(號)강수(江叟)
시호(諡號)문도(文度)
생년1484(성종 15)
졸년1540(중종 35)
시대조선전기
본관밀양(密陽)
활동분야문신 > 문신
박증영(朴增榮)
외조부박영달(朴英達)
저서『강수유고』

[상세내용]

박훈(朴薰)
1484년(성종 15)∼1540년(중종 3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형지(馨之), 호는 강수(江叟).

홍문관교리 박증영(朴增榮)의 아들이며, 모친은 현감 박영달(朴英達)의 딸이다.

1504년(연산군 10) 사마시에 합격하고 천거로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를 거쳐 보은현감에 임명되어 외지로 나갔으나 어진이를 임금 곁에 두지 않고 외직으로 내보내는 것은 잘못이라는 여론에 따라 사헌부감찰로 바뀌었다가 공조좌랑을 거쳐 사헌부지평에 올랐다.

1519년(중종 14) 현량과(賢良科)에 병과로 급제하고 사헌부장령사간원사간 등을 거쳐 동부승지에까지 올라 ‘국기(國器)’라는 명성을 들었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화를 입어 성주에 유배되었으나 이내 의주로 옮겨졌고, 13년 뒤에 안악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3년 뒤에야 유배생활에서 풀려나 향리인 청주에 은거하였다.

효도가 지극하여 어머니가 죽자 상주노릇을 너무 슬프게 하다가 몸을 상하여 병을 얻어 일생을 마쳤다. 성품과 자질이 순수하고 덕행과 기량이 자연히 이루어져 행동에 지조가 굳고 발라 법도가 있었으며, 마음에 있지 않아도 관대하고 화합하였다.

당대의 큰 선비와 두루 사귀었고, 특히 조광조와는 가장 친하여 조광조가 도목정사(都目政事) 때에는 상의하여 그의 의견에 따라 승진시키거나 내쳤다. 청주신항서원(莘巷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강수유고』 2권 2책이 전한다.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中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이미지]

[집필자]

이재룡(李載龒)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