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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흠(宋欽)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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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흠지(欽之)
호(號)관수정(觀水亭)
시호(諡號)효헌(孝憲)
생년1459(세조 5)
졸년1547(명종 2)
시대조선전기
본관신평(新平)
활동분야문신 > 문신
송가원(宋可元)
증조부송귀(宋龜)
출신지영광

[상세내용]

송흠(宋欽)
1459년(세조 5)∼1547년(명종 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흠지(欽之), 호는 지지당(知止堂)관수정(觀水亭). 영광 출신이다. 참판 송구(宋龜)의 증손이며, 문소전참봉(文昭殿參奉) 송가원(宋可元)의 아들이다.

1480년(성종 11) 사마시에 합격하고 1492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있다가 연산군학정으로 물러나서 후진 교육에 전심하였다.

1516년(중종 11) 홍문관정자로 복직, 저작박사수찬정언헌납병조정랑전라도도사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528년 담양부사, 1531년에 장흥부사를 지내고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전주부윤으로 전임, 뒤에 광주목사나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노모를 봉양하는 외에는 처자와 노복이 겨우 기한(饑寒)을 면할 뿐이요, 벼슬이 갈려 돌아오는 날에는 집에 한 섬의 곡식도 없었다 한다. 가는 곳마다 청렴하기로 소문이 나서 상사(賞賜)를 받았다.

1534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으나, 다시 노모를 위하여 왕의 특허를 받고 집에 돌아갔으며, 101세를 산 노모로 인하여 전후 7회에 걸쳐 효렴(孝廉)으로서 상을 받았다.

1538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고, 그뒤 한성부우윤이조판서병조판서우참찬 등을 역임, 1534년 판중추부사 겸 지경연사에 이르렀다.

기묘사화 뒤에는 한때 시냇가에 정자를 짓고 ‘觀水亭’이라는 액자를 걸어서 자기의 뜻을 붙였다. 영광수강사(壽岡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박익환(朴翼煥)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