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맹(李繼孟)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ACC4B9F9B1458X0 |
자(字) | 희순(希醇) |
호(號) | 묵암(墨巖) |
시호(諡號) | 문평(文平) |
생년 | 1458(세조 4) |
졸년 | 1523(중종 18)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전의(全義)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이영(李穎) |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계맹(李繼孟)
1458년(세조 4)∼1523년(중종 18).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희순(希醇), 호는 묵곡(墨谷) 또는 묵암(墨巖). 태사(太師) 이도(李棹)의 후손이며, 이영(李穎)의 아들이다.
1483년(성종 14) 진사‧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4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설서‧검교‧정언‧집의‧좌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라는 죄목으로 영광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조사결과 김종직이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 유생을 모아 시험을 치렀을 때 성적이 뛰어나 종이와 붓을 받았을 뿐 사제관계는 아니었음이 판명되어 석방되었다. 오랫동안 야인으로 지내다가 1503년에 장령이 되었고, 전한을 거쳐 좌부승지가 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대사헌에 승진되었으나 이듬해 박경(朴耕)의 옥사로 진도에 유배되었다. 곧 억울하게 연루되었음이 알려져 풀려나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09년에 경기도관찰사에 임명되고 이듬해에 성절사로 중국에 다녀온 뒤 평안도관찰사를 비롯하여 호조‧형조‧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517년 주청사(奏請使)로 중국에 가서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이성계(李成桂)가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 기록된 것을 발견하고 보고하였다. 이어 좌찬성‧병조판서 겸 지경연사(兵曹判書兼知經筵事)를 거쳤다. 성품은 강직하여 옳고 그른 것에 명백한 태도를 취하였고 군자다운 태도가 있었다.
전주의 서산사우(西山祠宇)와 김제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되고,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1483년(성종 14) 진사‧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4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설서‧검교‧정언‧집의‧좌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라는 죄목으로 영광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조사결과 김종직이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 유생을 모아 시험을 치렀을 때 성적이 뛰어나 종이와 붓을 받았을 뿐 사제관계는 아니었음이 판명되어 석방되었다. 오랫동안 야인으로 지내다가 1503년에 장령이 되었고, 전한을 거쳐 좌부승지가 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대사헌에 승진되었으나 이듬해 박경(朴耕)의 옥사로 진도에 유배되었다. 곧 억울하게 연루되었음이 알려져 풀려나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09년에 경기도관찰사에 임명되고 이듬해에 성절사로 중국에 다녀온 뒤 평안도관찰사를 비롯하여 호조‧형조‧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517년 주청사(奏請使)로 중국에 가서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이성계(李成桂)가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 기록된 것을 발견하고 보고하였다. 이어 좌찬성‧병조판서 겸 지경연사(兵曹判書兼知經筵事)를 거쳤다. 성품은 강직하여 옳고 그른 것에 명백한 태도를 취하였고 군자다운 태도가 있었다.
전주의 서산사우(西山祠宇)와 김제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되고,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참고문헌]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집필자]
송정현(宋正炫)
명 : "계맹(繼孟)"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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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