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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숭선(安崇善)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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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중지(仲止)
호(號)옹재(雍齋)
시호(諡號)문숙(文肅)
생년1392(태조 1)
졸년1452(문종 2)
시대조선전기
본관순흥(順興)
활동분야문신 > 문신
안순(安純)
조부안경공(安景恭)
증조부안종원(安宗源)
고조부안축(安軸)
송씨(宋氏)
처부송천우(宋千祐)

[상세내용]

안숭선(安崇善)
1392년(태조 1)∼1452년(문종 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중지(仲止), 호는 옹재(雍齋).

고조부는 고려 말기의 학자로서 도첨의찬성사를 역임한 안축(安軸), 증조부는 판문하부사를 역임한 안종원(安宗源), 조부는 조선의 개국공신에 오른 안경공(安景恭), 부친은 판중추원사를 지낸 안순(安純)이다. 부인은 송씨(宋氏)판전농시사 송천우(宋千祐)의 딸이다.

그는 1411년(태종 11) 생원시에 합격하고, 1415년에 음보로 계성전직(啓聖殿直)에 임명되었으며, 1418년에는 사헌감찰에 이르렀다.

1420년(세종 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지평으로 승진하였고, 그 이듬해에 이조전랑으로 전보되었으며, 1426년 장령이 되었다. 이때 사헌부에서 예조참판 이명덕(李明德)을 수차에 걸쳐 탄핵하였는데 그가 앞장을 섰다.

이 일로 세종의 뜻에 거슬려 좌천되었으며 곧 사헌부집의에 임명되었고, 1429년에 대호군으로 승진하여 함녕군(諴寧君) 인(裀: 세종의 동생으로 처음 받은 봉군호는 景寧君)을 따라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 사행은 명나라가 요구한 금은(金銀)의 양이 과다하여 이를 감면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사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기 때문에 귀국하자 그는 곧 동부대언(同副代言)에 발탁되었고, 1433년에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다.

그뒤 1437년 3월 대사헌으로 승진될 때까지 승지로 있었다.

1433년 파저강(婆豬江)의 야인정벌 때 세종의 정책을 적극 추진, 이로 인하여 세종의 신임을 크게 받았다.

그뒤 그는 조정의 인사행정에도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당시 사관의 평에 “겸판이조사(兼判吏曹事) 맹사성(孟思誠)은 착하기는 하지만 결단성이 없고 이조판서 신개(申槩)는 그저 남의 의견을 따르기만 하였기 때문에 모든 인사행정을 안숭선이 좌우하였다.”고 한 것은 당시의 사정을 잘 말하여주고 있다.

이와같이 승지의 법제외적 권한이 인사행정에 크게 작용하자 이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다. 이러한 비판은 자연히 안숭선 개인에게 집중되었으며, 나아가 승지의 인사행정과 관계되는 업무를 규제하려는 방향으로까지 전개되었다. 결국 1437년 3월에 안숭선대사헌으로 전보되고, 5개월 후에는 승지들의 전주권(銓注權)을 크게 제약하는 조처가 취해졌다.

1443년에 형조판서, 1444년에 성절사명나라에 다녀와서 지중추원사집현전대제학, 1445년에 병조판서 겸 지춘추관사로서 『고려사』 수찬에 참여하였고, 1448년에는 병조판서로서 예문관대제학을 겸하였다.

이때 정실인사가 문제되어 진천현에 부처되었다가 풀려나왔다.

1450년(문종 즉위)에 의정부우참찬을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다.

『근재집(謹齋集)』에 부록으로 유고가 전한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文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謹齋集(安軸)

[집필자]

정두희(鄭杜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