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득강(羅得康)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098B4DDAC15B1378X0 |
생년 | 1378(우왕 4) |
졸년 | 1444(세종 26)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나주(羅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나중우(羅仲佑) |
조부 | 나석(羅碩) |
증조부 | 나송기(羅松奇) |
출신지 | 전라북도 김제(金堤) |
묘소 | 북조산(北造山) |
[관련정보]
[상세내용]
나득강(羅得康)
1378년(고려 우왕 4)∼1444년(세종 26) 12월 3일. 조선 전기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전라북도 김제(金堤) 출신이다.
증조부는 나송기(羅松奇), 조부는 나석(羅碩)이다. 부친은 조선 건국 후 태조가 우의정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별세한 낙천와(樂天瀉) 나중우(羅仲佑)이다.
1419년(세종 1) 기해(己亥)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5위로 급제했다. 1420년(세종 2) 권지저작(權知著作)으로 통사랑(通仕郞) 봉상시녹사(奉常寺錄事)와 계공랑(啓功郞) 직장 겸 승문원박사(直長兼承文院博士)를 지냈고, 1422년(세종 4) 선무랑(宣務郞)으로 임피현(臨陂縣) 수령을 맡았다. 이어 통례문봉례랑 겸 한성참군(通禮門奉禮郞兼漢城參軍)‧우정언 지제고(右正言知制誥), 이조좌랑(吏曹佐郞), 함길도경력(咸鏡道經歷)을 거쳐 봉훈랑(奉訓郞)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을 지냈다. 1431년(세종 13) 예조정랑(禮曹正郞)과 전농시소윤(典農寺少尹), 봉상시소윤(奉常寺少尹)을 거쳐 의금부지사(義禁府知事)에 승진하였다. 이후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하였는데, 세종이 그를 아끼어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세자시강원찬선(吏曺判書兼世子侍講院贊善)으로 임명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으며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었다. 사후 세종이후히 부제(賻祭)를 내렸고, 김제군(金堤郡) 백산면(白山面)의 북조산(北造山) 아래 예장하도록 하였다.
증조부는 나송기(羅松奇), 조부는 나석(羅碩)이다. 부친은 조선 건국 후 태조가 우의정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별세한 낙천와(樂天瀉) 나중우(羅仲佑)이다.
1419년(세종 1) 기해(己亥)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5위로 급제했다. 1420년(세종 2) 권지저작(權知著作)으로 통사랑(通仕郞) 봉상시녹사(奉常寺錄事)와 계공랑(啓功郞) 직장 겸 승문원박사(直長兼承文院博士)를 지냈고, 1422년(세종 4) 선무랑(宣務郞)으로 임피현(臨陂縣) 수령을 맡았다. 이어 통례문봉례랑 겸 한성참군(通禮門奉禮郞兼漢城參軍)‧우정언 지제고(右正言知制誥), 이조좌랑(吏曹佐郞), 함길도경력(咸鏡道經歷)을 거쳐 봉훈랑(奉訓郞)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을 지냈다. 1431년(세종 13) 예조정랑(禮曹正郞)과 전농시소윤(典農寺少尹), 봉상시소윤(奉常寺少尹)을 거쳐 의금부지사(義禁府知事)에 승진하였다. 이후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하였는데, 세종이 그를 아끼어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세자시강원찬선(吏曺判書兼世子侍講院贊善)으로 임명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으며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었다. 사후 세종이후히 부제(賻祭)를 내렸고, 김제군(金堤郡) 백산면(白山面)의 북조산(北造山) 아래 예장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세종실록
김제의 전통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index.jsp)
김제의 전통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index.jsp)
[집필자]
박경이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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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30 | 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