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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달생(成達生)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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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효백(孝伯)
시호(諡號)양혜(襄惠)
생년1376(우왕 2)
졸년1444(세종 26)
시대조선전기
본관창녕(昌寧)
활동분야무신 > 무신
성석용(成石瑢)

[상세내용]

성달생(成達生)
1376년(우왕 2)∼1444년(세종 26). 고려조선초의 무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효백(孝伯).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 성석용(成石瑢)의 아들이다.

1390년(공양왕 2) 생원시에 급제하고 부음(父蔭)으로 벼슬에 나갔다.

1400년(정종 2) 2월 낭장 재직시에 평소부터 그를 총애하였던 왕세제(王世弟) 정안군(靖安君)의 천거로 호군(護軍)에 초수(超授)되었고, 1402년(태종 2) 조선시대 처음으로 실시된 무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고 대호군에 승진되었다.

1407년에는 흥덕진병마사(興德鎭兵馬使)로서 그곳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였고, 1410년 무과중시에서 2등으로 급제하여 다시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에 승진하였으며, 그뒤 웅무시위사첨절제사(雄武侍衛司僉節制使)판성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1415년에는 경성절제사로 파견되어 뛰어난 무예로써 야인위무에 공헌하고, 다음해 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가 되었다.

1417년 전라도도관찰사 겸 병마도절제사, 1418년(세종 즉위) 동지총제를 거쳐 내금위삼번절제사(內禁衛三番節制使)가 되어 상왕(上王: 太宗)과 세종이 모화루(慕華樓)에서 명나라 사신을 전송할 때에 별운검총제(別雲劍摠制)의 직책상 패검(佩劒)하고 세종을 시위한 일로 세종으로부터 상왕의 면전에서 패검한 무례를 질책받고 파직되었다가, 같은해 함길도병마도절제사판길주목사로 파견되면서 복직되었으나, 곧 강상인(姜尙仁)옥사에 연루되면서 자원안치(自願安置)되었다가 상왕의 가용지재(可用之才)라는 배려로 사면되었다.

1419년 중군총제에 서용되었고, 같은해 대마도정벌과 관련되어 전라경상충청도 수군도처치사(水軍都處置使)에 제수되었으나 승선을 꺼려 무단히 하륙한 일로 논죄된 뒤 연산(連山)에 유배되었다가, 곧 사면되면서 다시 좌군동지총제에 서용되었다.

1420년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온 뒤 경상우도수군도절제사경상우도수군도안무처치사좌군총제를 거쳐, 1422년 여연(閭延)에 침입한 야인의 격퇴를 위하여 특별히 평안도도관찰사로 파견되었으며, 다음해 관내의 기민을 구휼하지 못하였다고 논죄되면서 파직되었다.

1424년에 다시 총제에 서용되었고, 다음해에는 다시 평안도도절제사로 파견되었으며, 1427년 공조판서로 입조하였다가 진응사(進鷹使)가 되어 두번째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그뒤 도총제함길도병마도절제사함길도도절제사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등을 역임하였으며, 1444년 안질을 치료하기 위하여 충청도 초수리(椒水里)에 행행(行幸)한 세종을 수가(隨駕)하였다가 갑자기 죽었다.

능숙한 무예로 북변의 진수와 시위에 공헌함이 많았고, 필법에 뛰어났다. 시호는 양혜(襄惠)이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世宗實錄

[집필자]

한충희(韓忠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