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칭(呂稱)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5ECCE6DFFFFB1351X0 |
자(字) | 중부(仲父) |
호(號) | 저곡(樗谷) |
시호(諡號) | 정평(靖平) |
생년 | 1351(충정왕 3) |
졸년 | 1423(세종 5)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함양(咸陽)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관련정보]
[상세내용]
여칭(呂稱)
1351년(충정왕 3)∼1423년(세종 5). 고려말‧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중부(仲父), 호는 저곡(樗谷).
고려 말기에 문과에 급제, 사헌부규정‧전라도안렴사‧전법총랑(典法摠郞)‧전리총랑(典理摠郞) 등을 역임한 뒤, 공주와 나주의 목사 등을 지냈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양광‧경상‧전라도의 조전부사(漕轉副使)가 되고, 이어 판합문사(判閤門事)‧승추부우군동지총제(承樞府右軍同知摠制) 등을 역임하였을 때에 근면하고 치밀한 사람으로 정평이 있었다.
그뒤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참지의정부사가 되었다.
1400년(정종 2) 병조 전서(典書)가 되고, 1402년(태종 2) 태상왕이 된 태조가 북쪽지방을 순행할 때에 동북면의 도순문찰리사(都巡問察理使)로 배종하였다.
1404년에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들어가서 왕실의 계통이 잘못 전해진 것을 바로잡는 데 힘쓰는 한편, 그때 명나라에 억류되어 있던 우리 동포들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데 노력하였다. 명나라에서 돌아와 곧 서북면의 도순문찰리사로 병마도절제사를 겸하였다.
1407년에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를 거쳐, 1413년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가 되었고, 그해에 형조판서가 되었다.
1414년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가 되었으며, 그해에 흠문기거부사(欽問起居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곧 사직, 은거하였다. 시호는 정평(靖平)이다.
고려 말기에 문과에 급제, 사헌부규정‧전라도안렴사‧전법총랑(典法摠郞)‧전리총랑(典理摠郞) 등을 역임한 뒤, 공주와 나주의 목사 등을 지냈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양광‧경상‧전라도의 조전부사(漕轉副使)가 되고, 이어 판합문사(判閤門事)‧승추부우군동지총제(承樞府右軍同知摠制) 등을 역임하였을 때에 근면하고 치밀한 사람으로 정평이 있었다.
그뒤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참지의정부사가 되었다.
1400년(정종 2) 병조 전서(典書)가 되고, 1402년(태종 2) 태상왕이 된 태조가 북쪽지방을 순행할 때에 동북면의 도순문찰리사(都巡問察理使)로 배종하였다.
1404년에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들어가서 왕실의 계통이 잘못 전해진 것을 바로잡는 데 힘쓰는 한편, 그때 명나라에 억류되어 있던 우리 동포들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데 노력하였다. 명나라에서 돌아와 곧 서북면의 도순문찰리사로 병마도절제사를 겸하였다.
1407년에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를 거쳐, 1413년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가 되었고, 그해에 형조판서가 되었다.
1414년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가 되었으며, 그해에 흠문기거부사(欽問起居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곧 사직, 은거하였다. 시호는 정평(靖平)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太宗實錄
世宗實錄
太宗實錄
世宗實錄
[집필자]
이재범(李在範)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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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