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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제(閔霽)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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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중회(仲晦)
호(號)어은(漁隱)
시호(諡號)문도(文度)
생년1339(충숙왕 후8)
졸년1408(태종 8)
시대조선전기
본관여흥(驪興)
활동분야문신 > 문신
민변(閔忭)
출신지여흥
공신호순충동덕보조찬화공신(純忠同德輔祚贊化功臣)

[상세내용]

민제(閔霽)
1339년(충숙왕 복위 8)∼1408년(태종 8).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중회(仲晦), 호는 어은(漁隱). 여흥 출신. 민변(閔忭)의 아들이고, 민무구(閔無咎)의 아버지이며, 태종의 장인이다.

1357년(공민왕 6) 문과에 급제, 곧이어 국자직학(國子直學)에 보직되었고,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전리정랑지제교(典理正郞知製敎)성균사예(成均司藝)전교부령(典校副令) 등을 역임하였다. 우왕지춘주사(知春州事)로 나가서는 은혜로운 정사를 베풀었다. 다시 판소부시사(判小府寺事)예의판서(禮儀判書) 등을 역임하였고, 창왕개성윤(開城尹)상의밀직사사(商議密直司事)를 거쳐, 1389년(공양왕 1)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역임하였으며, 예조판서에 이어 한양부윤(漢陽府尹) 등을 지냈다.

1392년(태조 1) 조선이 개국되자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고, 이어 예문춘추관태학사(藝文春秋館太學士)에 올랐다.

1394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유원지(柳源之)와 함께 명나라에 가서 연정(年正)을 하례(賀禮)하였고, 이듬해 여흥백(驪興伯)에 봉해졌으며, 영예조사(領禮曹事)에 올랐다.

1399년(정종 1)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김반(金泮) 등 33인을 선발하였다.

1400년 판삼사사(判三司事)에서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으로 임명되었으며, 곧 좌정승에 올랐다.

이듬해 순충동덕보조찬화공신(純忠同德輔祚贊化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여흥백에서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으로 개봉되었다.

1402년(태종 2) 이지직(李之直)전가식(田可植) 등이 순군옥(巡軍獄)에 관련되자 그뒤로는 문생들을 만나보지 않았으며, 같은해 인사문제로 탄핵을 받았다.

1406년 태종이 세자 이제(李褆)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을 때 하륜(河崙)조영무(趙英茂)이숙번(李叔蕃) 등과 함께 옳지 못함을 주장하였다.

이듬해 명나라와 세자간의 혼사문제로 하륜조영무 등과 함께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장인이자 태종의 잠저시 사부였던 관계로 왕의 비호를 받아 무사하였다.

1407년 하륜좌정승, 조영무우정승이 되자 하륜과 아들인 민무구민무질(閔無疾) 등에 대한 탄핵상소가 잇따라 있었으나 태종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이어 민무구민무질형제가 붕당을 지어 세자를 끼고 집권을 도모한다는 탄핵이 있었으나 그의 공덕으로 두 아들이 무사하였으며, 이듬해 검교찬성사(檢校贊成事) 조호(趙瑚), 전총제(摠制) 김첨(金瞻)허응(許應) 등과 붕당을 지어 난을 도모하고 있다는 탄핵을 받았으나, 그의 성품이 평소 온후하고 청렴하여 사치를 즐기지 않았던 관계로 태종으로부터 신임이 두터웠기 때문에 성명(性命)을 온전히 보존하였다.

그해 병으로 눕게 되자 유배지에 가 있는 민무구민무질형제를 사간들의 여러 차례 반대상소에도 불구하고 문병차 불렀으며, 자리에 누운 지 6일 만에 죽었다.

그는 태종의 잠저시에는 항상 ‘선달(先達)’이라 일컬어졌고, 태종은 그를 ‘사부(師傅)’라 부를 정도로 가까웠으며, 그가 사건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거나 자식들이 죄를 지었는데도 큰 화를 입지 않은 것은 태종으로부터의 두터운 신임과 왕의 장인이라는 위치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는 하륜이무(李茂)조호 등과 뜻을 같이하는 사이였으며, 문생에는 전가식조서(趙敍)이공의(李公義)옥고(玉沽) 등이 있다. 젊어서부터 예절을 잘 알아 추부(樞府)에 올라서는 항상 예조(禮曹)를 겸하였고, 국가의 전례(典禮)를 모두 자세하게 정하고 예문(禮文)을 세웠다.

또한, 이단(異端)과 음사(淫祀)를 싫어하여 강력히 배척하였고, 복색을 정하고, 불사(佛事)를 줄일 것을 청하여 춘추장경(春秋藏經)외는 모두 없앨 것을 주장하였다.

타고난 자질은 어질고 검소하였으며 경사(經史)에 밝았는데 특히 사학(史學)을 잘하였고, 시에 대한 평도 잘하였다.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太宗의 外戚除去에 對하여―閔氏兄弟의 獄―(金成俊, 歷史學報 17‧18合輯, 1962)

[집필자]

김성준(金成俊)

성명 : "민제(閔霽)"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紀年便攷v6李天祐完豊君元桂桓祖一男謚襄平子閔霽婿策開國功二等定宗朝策定社㓛二等太宗朝策佐命功二等官止判書贈大匡輔國完山府院君謚襄度配享太宗廟庭兄良
紀年便攷v6隣子允源姪李仁復姪婿忠惠王壬午生字大臨號浩亭李穡門人恭愍王乙巳登科氣量深厚喜怒不形素好相人太宗微時因閔霽而見曰盖天英氣吾相人多矣未有如公之甥也遂傾心結交為忠清觀察使靖安君徃餞崙佯醉覆饌汚御衣靖安君怒而起崙
紀年便攷v6閔霽
紀年便攷v6閔霽驪興人驪興君棲閒堂忭子思平姪忠肅王己卯生字仲晦號漁隐恭愍王丁酉十九登第仕止門下左政丞修文舘大提學入我
震史記略v1六年丁丑正月葬康妃于城內皇華坊建天興寺于陵東○春置舍人所於義興三軍司○建成均館于文廟傍使左僕射閔霽主其事○置濟生院令各道輸鄕藥材料如惠民局從趙浚言○琉球國王遣使稱臣奉箋暹羅國遣使獻方物○秋日本遣使
震乘總v1閔霽
震乘總v1縣者遂居最後湊預定社之亂其妻跪於崙馬首曰我是金湊妻也崙遂力救得免氣量深厚喜怒不形素好相人因閔霽見上曰蓋天英氣吾相人多矣未有如公之二甥者遂求見上傾心交結爲忠淸監司上龍潛往餞其家崙佯醉覆饌盤汚御衣
見睫錄v1右第九十七章○太祖諸子○惟太宗克肖河崙因閔霽得見終始輔翊與酈食其謁漢帝事同
記聞v1四年壬寅昇遐壽五十六○錄推忠奮義翊戴佐命功臣李佇等三十八人李居易號淸虛堂太宗庚辰拜相○相號漁隱閔霽浩亭河崙李居易獨谷成石磷李茂趙英茂權仲和龜亭南在柳亮柳廷顯釣隱朴訔信齋韓尙敬沈溫亨齋李稷姜筮○配享領
小華龜鑑v1村家翌朝請之乃還將封世子恭靖曰自開國至今日皆靖安功我不可爲世子靖安固辭遂冊恭靖爲世子○初河崙善相人謂閔霽曰吾相人多未有如公貳甥者仍請謁傾心事之慵齋叢話曰崙爲忠淸觀察太宗往餞群客滿座崙佯醉覆饌汚御衣太宗怒起
小華龜鑑v1閔霽號漁隱上元舅也闢異端惡淫祀畫璞穎嗾犬逐僧巫狀觀之嘗謂無咎無疾等驕盈必誅後無咎無疾謫海島賜自盡卽太宗九
小華龜鑑v1領李舒字孟陽號戇翁麗相孝旌開國功再致仕左閔霽字仲晦號漁隱麗科太宗國舅諡文度領河崙字太臨號浩亭恭愍科定社佐命勳領成石璘字子修號獨谷恭愍科筆法名世几
小華龜鑑v1字有隣閔霽壻諡恭肅
野乘v1○乙卯盧閈拜右儀政夫人閔氏入謝上曰非予私恩乃太宗遺敎也閈字有隣閔霽之婿也己丑妻弟無咎䓁㘴罪公亦落聝者十四年太宗曰盧閈娶閔氏收其告身非其罪也遂命召還及爲相務在大軆
國朝捷錄v01閔 霽
國朝捷錄v01字有鄰交河人乙卯拜左恭肅公身長九尺土芥金玉爲相務持大體思愼祖左議政頉曾孫閔霽壻 鈞子
靑邱風雲v1號厖村權近號陽村卞季良號有春亭李詹號雙梅堂金子粹號桑村宋因號杏亭權遇號梅軒李原號容軒閔霽號漁隱太宗國舅李種德號麟齋牧隱之子柳觀號憂亭鄭以吾號郊隱趙俊號松堂韓尙敬號信齋河演號敬
東國續修文獻錄v1李舒字孟陽號戇翁洪州人文領相致仕文簡閔霽字仲晦號漁隱驪興人文右相國舅文度河崙字大臨號浩亭晉州人文領相文忠成石磷字子修號獨谷昌寧人
東國續修文獻錄v1和見相八十三安景恭遜夫見功八十一黃喜見相九十李舒見相七十二成石磷見相八十許稠見相八十六河演見相八十二閔霽見相金士衡見相八十九河崙見相七十五李茂見相七十九崔恒見相七十九盧思愼見相八十四魚世謙見相八十一柳洵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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