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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인길(睦仁吉)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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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1380(우왕 6)
시대고려후기
본관사천(泗川)
활동분야무신 > 무관

[상세내용]

목인길(睦仁吉)
미상∼1380년(우왕 6). 고려 후기의 무관. 본관은 사천(泗川).

공민왕원나라에서 숙위(宿衛)할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시종하여 11년간이나 원나라에 있었던 공으로, 왕이 즉위하자 신임을 받아 계속 승진, 병부상서가 되었다.

1359년(공민왕 8) 왕의 명을 받고 밀직(密直) 강중경(姜仲卿)과 함께 친원파(親元派)인 기철(奇轍)의 일파를 제거하였는데, 이때 목인길대호군(大護軍)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남쪽으로 피난갈 때 시종한 공으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전보되었다.

1362년 왕의 총애를 믿고 방자한 행동을 하다가 감찰사(監察司)와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아 마침내 전리(田里)에 유배되었으나, 흥왕사(興王寺)의 변 이후 다시 발탁되어 궁중에서 서무(庶務)를 맡았다.

1365년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고, 신돈(辛旽)이 기용된 뒤 구공신(舊功臣)들이 거의 제거되었으나 첨의평리목인길은 무인으로 글자를 알지 못하므로 신돈이 꺼리지 않아 무사하였다.

그러나 신돈의 비행이 자주 목인길에게 드러나자, 왕에게 고할까 두려워하여 신돈이 왕에게 참소하여 임군보(任君輔)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전주로 유배되었다.

1367년 지도첨의(知都僉議) 오인택(吳仁澤) 등과 더불어 신돈을 제거하기로 모의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청주로 장류(杖流)되어 관노가 되었으며 가산이 적몰되었다.

그뒤 다시 기용되어 1374년 제주토벌을 위한 전라도상원수(全羅道上元帥)로 발탁되었다. 우왕 즉위 후 찬성사(贊成事)가 되었고, 1377년(우왕 3)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다. 이해 문하찬성사판판도사사(門下贊成事判版圖司事) 지윤(池奫)과 더불어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福興)최영(崔瑩) 등을 제거하기로 모의하였다.

그러나 목인길은 도리어 이인임에게 밀고하여 지윤의 족당을 모두 붙잡히게 하였다.

1378년 군사들에게 화포 발사와 수전(水戰)을 훈련시키기도 하였으며, 이듬해 실언으로 인하여 이인임의 분노를 사 전라도로 출정하여 여기에서 왜적을 무찔렀다.

1380년 대사헌 우현보(禹玄寶) 등으로부터 모반을 꾀한다는 무고를 받고 파직,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燃藜室記述

[집필자]

이희덕(李熙德)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