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군보(任君輔)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84AD70BCF4U9999X0 |
생년 | ?(미상) |
졸년 | ?(미상) |
시대 | 고려후기 |
본관 | 풍천(豊川)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임거경(任巨敬) |
공신호 | 성근익찬공신(誠勤翊贊功臣) |
[상세내용]
임군보(任君輔)
생졸년 미상.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임거경(任巨敬)의 아들이다.
1352년(공민왕 1) 밀직사지신사(密直司知申事)가 되고 1355년 천추사로 원나라에 다녀온 뒤 밀직부사가 되었다. 이어 환관 김빠앤티므르(金伯顔帖木兒)의 거짓 왕지(王旨)로 내승제조(內乘提調)가 되었다가 사실이 발각되어 태안군에 유배되고, 다시 제주에 이배되었다. 다시 기용되었으나 1356년 기철(奇轍) 등이 복주(伏誅)될 때 삭발하고 삼각산(三角山)에 숨었다가 붙잡혀 장형(杖刑)을 당하였다.
1365년 새로 집권한 신돈(辛旽)에 의하여 밀직부사에 복직되어 김란(金蘭)‧목인길(睦仁吉)과 함께 궁중에서 서무(庶務)를 맡아 총애를 받았다.
이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어 성근익찬공신(誠勤翊贊功臣)의 호를 받았다. 신돈의 천거로 재상이 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최영(崔瑩)‧이구수(李龜壽) 등의 폄출(貶黜)을 반대하고 천승(賤僧)인 신돈에게 정사(政事)를 맡기지 말 것을 간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같이 복직된 김보(金普)가 신돈의 참소로 재상직에서 파면된 이후로 국사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이어 간관 정추(鄭樞)와 이존오(李存吾)가 신돈을 논하다가 쫓기게 될 때 이를 구호하여 더욱 신돈의 미움을 받았다.
이때 신돈이 참소하여 전주에 유배된 목인길을 변호하다가 여흥으로 유배되었다.
1352년(공민왕 1) 밀직사지신사(密直司知申事)가 되고 1355년 천추사로 원나라에 다녀온 뒤 밀직부사가 되었다. 이어 환관 김빠앤티므르(金伯顔帖木兒)의 거짓 왕지(王旨)로 내승제조(內乘提調)가 되었다가 사실이 발각되어 태안군에 유배되고, 다시 제주에 이배되었다. 다시 기용되었으나 1356년 기철(奇轍) 등이 복주(伏誅)될 때 삭발하고 삼각산(三角山)에 숨었다가 붙잡혀 장형(杖刑)을 당하였다.
1365년 새로 집권한 신돈(辛旽)에 의하여 밀직부사에 복직되어 김란(金蘭)‧목인길(睦仁吉)과 함께 궁중에서 서무(庶務)를 맡아 총애를 받았다.
이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어 성근익찬공신(誠勤翊贊功臣)의 호를 받았다. 신돈의 천거로 재상이 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최영(崔瑩)‧이구수(李龜壽) 등의 폄출(貶黜)을 반대하고 천승(賤僧)인 신돈에게 정사(政事)를 맡기지 말 것을 간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같이 복직된 김보(金普)가 신돈의 참소로 재상직에서 파면된 이후로 국사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이어 간관 정추(鄭樞)와 이존오(李存吾)가 신돈을 논하다가 쫓기게 될 때 이를 구호하여 더욱 신돈의 미움을 받았다.
이때 신돈이 참소하여 전주에 유배된 목인길을 변호하다가 여흥으로 유배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史節要
[집필자]
박성봉(朴性鳳)
대표명 | 임군보(任君輔) |
명 | 군보(君輔) |
명 : "군보(君輔)"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